인도 인문학 산책 10: 왜 인도 사티(Sati)는 여인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가?
이번 인문학 산책은 인도 사티(Sati)이다. 사티(Sati)는 남편이 죽으면 시체를 화장할 때 아내가 불 속에 뛰어들어 남편의 시체와 함께 불타는 풍습이다. 인도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종에 악습이다. 사티(Sati)라는 말의 뜻은 ‘정숙한 아내’를 의미한다. 힌두교 파괴의 신 시바의 첫 부인 사티(Sati)이다. 아버지가 남편 시바의 명예를 모독한 것에 대해 분노한 나머지 희생제의 불에 몸을 던져 희생했다는 이야기에서 아래 악습의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인도에서 사티는 오랜 역사를 지녔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BC 4세기 무렵부터 인도 북서부 인더스강 유역의 펀자브 지역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인도의 고대 서사시 ‘마하바라타(Mahabharata)’, ‘라마야나(Ramayana)’에도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처음에는 상층계급에서만 행해졌으나 과부의 재혼 금지 조항이 나오면서, 점점 일반인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현재에도 인도 각 지방에는 사티에 관련된 비석이나 돌 그리고 전설들이 남아있다. 인도 신화에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아니, 인도 신화에서 유래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이야기는 이렇다.
시바 신의 첫 번째 아내의 이름이 사티이다. 사티가 결혼할 나이가 되었을 때, 그녀의 아버지인 다크사는 신들을 모아놓고 사티의 남편을 물색하였다. 그런데 이 의식에는 시바만이 초대를 받지 못했는데, 사티는 자신의 남편이 될 사람이 시바만이 유일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사티는 화관을 던지고 던진 화관을 시바가 잡게 되면서 둘이 결혼을 하게 된다. 그 후 시바는 다크사에게 건방지게 행동하고 이에 화가 난 다크사는 시바만을 제외하고 성대한 의례를 하게 된다. 이를 알게 된 사티는 남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산 제물로 해 화염으로 들어간다. 이것을 알게 된 시바는 다크사에게 쳐들어가 복수하고 사티의 시신을 찾는다. 이에 크게 분노한 시바는 세상을 한 번 멸망시킬 뻔했다가 상심해 고행에 들어갔고, 한편 사티는 히마바트의 딸 파르바티로 환생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인도인들은 ‘사티’가 이상적인 아내상이고 힌두교도들은 사티(Sati)처럼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도는 남존여비 사상이 어는 나라보다 심하다. 인도 속담은 “여자들의 흠이라 수천이고 여자들의 장점은 딱 세 개다. 집안을 돌보고, 아들을 낳고, 남편과 함께 죽는 것이다.”라고 했고 인도 고대 성전이 『마누법전』에서도 “여자는 어릴 때는 아버지 지배 아래에 있어야 하고, 젊을 때는 남편의 지배 아래에 있어야 한다. 남편이 죽고 나면 아들들의 지배 아래에 있어야 한다.” 기록되어 있다. 인도 고대 우화집 『빤짜딴뜨라』에서도 “집에 음식이 넉넉하지 않으면 남자아이에게만 음식을 주고 딸이 태어나면 이 세상에서는 큰 근심거리가 있다.”라고 할 만큼 인도는 고대 때부터 남존여비 사상이 존재하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사건은 아내들에게 불행을 넘어서서 큰 재앙이었다. 그래서 과부는 친척들로부터 가문의 남성 중 한 명과 동침할 것을 강요당했다. 왜냐하면 남편이 죽으면 그 모든 재산이 아내에게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을 죽인 사람처럼 낙인이 찍히고 평생을 집안에서만 살아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힌두교에 따르면 과부들은 재혼도 못 하고 남자를 유혹해서도 안 되고 머리카락을 전부 깎고 장신구를 걸치면 안 된다. 그리고 하얀 옷만 입어야 한다. 그중에서도 사티가 가장 끔찍한 악습이다. 남편을 잃으면 불 속으로 뛰어들게 한다. 심지어는 반항이 심하면 환각제를 먹인 채로 말이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화장도 밀폐된 공간이 아니라 실외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시간 역시 오래 걸리고 고통이 그만큼 길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가족이나 친척들이 가족이나 다름없는 과부에게 사티를 종용했는가? 가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아마 그 대답은 다름 아닌 돈 때문이다. 사티를 행한 여자에게는 여신으로 승격될 뿐만 아니라 사원도 만들어 주고 게다가 친척들은 엄청난 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일가친척에게 엄청난 부가 들어오는 일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가족들은 과부가 사티에 의해서 희생당하면 가족의 종교적인 죄가 없어진다고 사티를 조장하였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사티의 대부분이 과부의 자발적인 행위가 아니라 친족의 강요와 약물에 의해서였다. 그래서 전통이라는 핑계로 말이다. 심지어는 사티를 주관하는 높은 계급 브라만들도 여기에 결탁하였다. 그래서 과부에게 아주 화려한 옷과 비싼 장신구를 착용을 권했고 사티 이후에는 그 장신구를 챙겼다는 것이다. 중세시대에는 인도 전역에 사티가 전파되면서 각 마을에는 사티를 기념하는 돌이 수없이 생겼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이런 악습 사티는 금지와 시행을 반복하였다. 16세기 무굴제국의 악바르 대제가 사티를 금지하였으나 그가 죽은 후 다시 시행했고 1829년 동인도 회사의 총독 벤틱 경도 금지했지만, 인도 조드푸르의 도시에서 메헤랑가르성 벽면에는 15명의 아내가 사티로 죽기 전 남긴 손바닥 도장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을 정도로 근절되지 못했다. 그리고 사티 금지에 결정적으로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기독교 선교사 윌리엄 캐리였다. 그는 사티가 자발적이지 않음을 알고 학대받는 여성들을 위해 학교를 세워 교육하고 여아 살해, 어린이 매춘 등 악습에 오랫동안 반대 운동을 펼쳤다. 캐리가 1802년 한 해 동안 조사에 의하면 캘커타 주위 50km 반경 안에서 438명의 과부가 ‘사티’로 불에 타 죽었다. 이것을 근거로 캐리는 식민지 총독에게 사티를 폐지를 요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오히려 선교사 케리에게 돌아온 것은 선교사를 추방하라는 요구였다. 더욱이 그에게 힌두교 자체를 무너뜨리는 사람으로 비난했다. 아마 그들에게 카스트 제도 자체가 무너지면 모든 기득권이 한순간에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선교사들의 끊임없는 노력 끝에 비로소 1829년 법으로 사티를 금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법으로 금지되었음에도 여전히 보수 힌두교에서는 힌두교의 전통을 사수하자는 명목으로 사티의 폐지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현재 사티가 폐지된 지 100년 이상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골에서는 죄 없는 과부들이 불구덩이 속으로 내던져지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나라 조선 시대에도 사티와 비슷한 성격의 것들이 있었다. 바로 열녀문이다. 국가에서 여자들에게 정절을 강조했다. 임금에 대한 신하의 충(忠)과 어버이에 대한 효(孝)와 거의 같을 정도로 정절을 지킨 아내를 국가가 나서서 보상하고 남편을 따라 자결한 부인들을 기리는 열녀문을 세워주었다. 실제로 ‘조선경국전’에도 “과부로서 수절하는 자에게는 토지를 준다”라는 구절이 있다. 반대로 정절을 헤친 아내에 대해선 불이익을 주었다. 그리하여 가문들은 자신의 집안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과부에게 자살을 강요하거나 위장하기도 했다. 마치 인도 사티처럼 말이다. 중국의 어느 지방에서도 과부들이 단체로 자살했을 때 그녀들을 매장하면서 이를 축제처럼 진행하기도 하였다. 베트남에서도 존재했다. 서기 192년부터 1832년까지 무려 1,600여 년 동안 베트남 중남부 지역에 존재했던 참족의 나라에 관련된 이야기이다. 13세기에 베트남 대월국 황제 영종이 공주를 참파 왕(베트남 말레이계 참인)에게 시집 보냈는데 참파 왕이 죽자 공주가 사티를 피해 베트남으로 도망가고 이로 인해 베트남과 참파가 전쟁까지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필자가 옛날 참파 왕국 지역인 베트남 무이네 포사누이 참탑을 방문하면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 당시 세워진 포사누이 참탑도 힌두교 사원으로 인도 문화를 받아들인 흔적이 여러 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사티는 ‘정숙한 아내’라는 의미도 있지만, 힌디어로 ‘용감한 아내’라는 뜻도 있다. 이 단어 모두 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서 파생된 의미로 보인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은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이것을 사티 풍습이 적난하게 보여주고 있다. 암암리에 인도에서는 여전히 사티 문화로 인해 그 뼛가루를 만지기 위해 관광객이 몰리고 그 뼛가루를 판매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일어나서는 안 되는 극악무도(極惡無道)한 일이다. 사티와 비슷한 유형의 형태가 역사상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인도의 사티만큼 오랜 역사를 통해 종교의 굴레로 여성을 억압한 사례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사티는 인도판 열녀문이다. 극단적인 종교적 강요와 카스트 제도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더는 세상에 없었으면 한다. 2024/6/18 뜨르/ 혜윰인문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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