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인문학 산책 12: 요가(Yoga)란 무엇인가.
이번 인도 인문학 산책은 요가(Yoga)란 무엇인가.? 요가(Yoga)는 고대 인도에서 제의적으로 비롯된 명상의 한 방법으로 힌두교의 정신 수행 방법의 하나로도 알려져 있다. 현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될 만큼 세계적으로 인정되었다. 요가는 요즘 현대인들에게 아주 잘 알려진 운동이지만, 사실상 아주 고대부터 내려온 신체와 정신의 통합된 수련 방법이었다. 요가 철학 역사는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만큼 꽤 길다. 인도에 아리아인들이 도착하기 이전 드라비다 문화의 하라파 문명에서 요가의 기원이 존재한다는 설이다. 간략히 말하자면, 기원전 2000~1500년경 아리아인들이 인도에 들어오기 전 인더스 문명의 쌍둥이 도시가 모헨조다로와 하라파(Harappa)가 있었는데, 베다 문화의 자연신 숭배와 달리 풍요제의 성격을 띠는 신상 숭배적인 토착 문화가 있었다. 흔히 요가는 힌두교 베다 문화에 그 뿌리가 있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하라파와 모헨조다로에서 시바 신의 원형으로 생각되는 요가 수행자의 자세를 취한 조소상이 발견되면서 아리안 지배 이전 드라비다 문화에서부터 요가의 기원이 시작되었다는 설이 힘을 얻고 있다. 본격적으로 내용과 형식을 제대로 갖춘 수행법으로 요가의 역사는 우파니샤드 시대이다. 즉, 불교 발생 이전으로 보인다. 카타 우파니샤드는 요가에 대해 ‘모든 심리기관을 굳게 집지(執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인간의 오감(五感). 생각. 인식 등의 작용이 모두 멈춘 상태이다. 이처럼 모든 감각 작용이 완전히 정지하는 최고의 상태를 요가 혹은 영적 융합(spiritual union)이라고 부른다. 따읻뜨리야 우파니샤드에서는 요가를 인간의 몸으로 나타내 여러 부위를 특정한 수행법의 의미로 표현하여 설명한다. 바가바드기타(Bhagavad Gita)에서는 요가를 평정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4세기 무렵 파탄잘리(Patanjali)의 ‘요가 수트라’(Yoga Sutra)에서는 요가를 심(心) 작용의 소멸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에는 요가에 대해 이론·실천 측면에서 가장 체계적이고 권위 있는 최초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요가수트라’에서 소개한 8가지 요가 수행법이 하나의 학파로서 자리를 잡았고 현재까지 인도인들에게 전승되어 오고 있다.
이처럼 요가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종류도 다양하다. 보통 힌두교의 전통에서 수행 방법에 따라 요가는 여섯 가지로 구분한다. 라자요가, 하타요가, 갸나요가, 박티요가, 카르마요가, 만트라 요가가 그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바가바드기타》에서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카르마 요가, 즈나나 요가, 그리고 박티 요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박티 요가에 대한 최고의 힌두교 경전은《바가바드기타》와《바가바타 푸라나》이다.《바가바드기타》가 이론적 측면이라면《바가바타 푸라나》에서는 실천적으로 박티를 다루어져 있다. 라자 요가는 파탄잘리의《요가수트라》에 의해 확립되었다. 파탄잘리에 의해 성립된 요가학파는《 찟따(생각) 》를 주요 경전으로 하고 라자 요가를 수행법으로 한다. 현대에도 다양한 요가의 유형이 존재한다. 대략 8가지가 존재한다. 1. 아쉬탕가 요가(Ashtanga Yoga). 2. 아헹가 요가(Iyengar Yoga) 3. 테라피 요가(Therapy Yoga)/비니 요가(Vini Yoga) 4. 빈야사 요가(Vinyasa Yoga) 5. 비크람 요가(Bikram Yoga)/핫 요가(Hot Yoga) 6. DDP 요가(DDP Yoga) 7. 플라잉 요가(Anti gravity Yoga, Aerial Yoga) 8. 인요가(Yin Yoga) 등을 들 수 있다. 이중 현재 한국에서 유행하는 요가는 전통 요가인 하타요가(Hatha Yoga)와 현대요가인 아쉬탕가 요가(Ashtanga Yoga)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인 중 많은 사람이 요가의 깊은 역사를 잘못 이해하는 듯하다. 제일 먼저 ‘요가’ 하면 몸의 유연한 굴곡을 연상한다. 그래서인지 요가를 운동이란 개념으로만 이해한다. 이런 오해는 요가가 몸을 돌보는 것을 첫 번째 다르마(의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요가 수련 시작도 아사냐(요가의 동작)이고 하다 보니 그렇다. 이 말은 요가를 수련하는 목적이 몸매 관리와 근골격의 통증을 없애는 데 있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도 현대에는 요가의 정신적인 수행 등은 대부분 간과되고 요가의 동작만을 이용한 다이어트의 일종으로 전 세계에서 주목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팝 가수 마돈나 등도 요가 예찬론자이다. 요가는 다이어트 외에도 재활 운동 쪽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예컨대, 미국에서 병사들의 육체적 능력의 향상과 야전에서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줄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2010년부터는 미군의 훈련 프로그램에서도 요가 과목이 들어가 있을 정도이다. 이처럼 요가가 어느새 우리 일상생활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는 방증이다. 흔히 우리가 요가 동작이 스트레칭 효과가 있는 건 맞다. 하지만 어찌 보면 요가는 철학이고 정신수련이다. 또한, 정신과 연결하여 있는 몸을 단련하고 마음을 제어하기 위한 동작으로 즉 삼매, 해탈을 목표로 한다. 이것은 불교 이전부터 인도에 있던 철학적인 관념이었다. 필자가 볼 때도 요가는 정신을 제어하기 위해 몸의 동작이 수반되는 행위이지 몸만을 단련하는 행위로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와 근거를 더듬어 보자.?
요가는 신에 이르는 방법이 사색이 아니라 수행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근본적으로 요가 사상 체계는 그 기초를 상키야(Sankhya, 數論) 철학에 두고 있다. 왜냐하면, 사상의 많은 부분을 상키야 철학에서 빌려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요가 철학과 상키아 철학이 같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상키야 철학이 무신론이라면, 요가 철학은 유신론에 속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엔 요가 철학은 상키야 철학 등 여러 철학이 혼합된 듯하다. 상키야 철학에서 세계(世界)는 다수의 ‘푸루샤(Purusa)’와 단일한 ‘프라크리티(Prakriti)’로 이루어져 있다. 푸루샤(Purusa)는 ‘영혼(靈魂)’이나 ‘자아(自我)’, ‘남성(男性)’로 생각할 수 있다. 상키야 철학에 따르면 푸루샤(Purusa)는 불변한다. 푸루샤(Purusa)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항상 편재(遍在)하고, 불멸(不滅)한다. 즉 상키야 철학에 따르면 인간은 이러한 푸루샤(Purusa)의 성질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을 만들어 내고 푸루샤(Purusa)의 본질을 직관하고 자아(自我)의 완전성(完全性)을 깨닫는 순간 해탈(解脫)한다는 것이다. 작은 천 조각을 찢으면 더 작은 천 조각이 있고 그보다 더 작은 조각이 있을 것이다. 찢고 또 찢으면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무언가가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데까지 미분하고 나면 그곳에는 세계의 본질만이 존재한다. 그 본질이 바로 프라크리트(Prakrit)이다. 필자가 보기 앤 일종의 자성(自性)이고 존재성(存在性)으로 보인다. 영어로는 Cosmic Substance이다. 세계(世界)는 바로 이러한 프라크리트(Prakrit)의 전개로 말미암아 만들어졌다. 푸루샤(Purusa)를 제외하고 나면 프라크리티(Prakriti)만이 남는다. 예컨대 누군가 지금 시를 쓰는 중이라면 시를 쓰는 그 생각조차도 프라크리티(Prakriti)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생각은 불완전하고 푸루샤(Purusa)는 완전하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모든 것은 프라크리티(Prakriti)이고, 프라크리티(Prakriti)의 전개 중에 있다. 따라서 불완전한 '나(自我)'를 포함한 모든 세계의 객체는 프라크리티(Prakriti)가 전개되어가는 모습이다. 한 마디로 몸이나 마음, 나를 나라고 생각하는 자아의식 즉 아항까라(Ego)조차도 프라크리티(Prakriti)의 일부인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푸루샤(Purusa)만이 불변하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불변하는 푸루샤(Purusa)의 본 모습을 제대로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푸루샤(Purusa)를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인 찟따(Citta, 생각)를 정결하게 하고 동요치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방법이 바로, 요가이다.
요가(Yoga)의 뜻은 산스크리트어 ‘yuj’를 근원으로 ‘결합하다’는 의미로 요가제어(Control)·합일(Union)·수단(Means)·방법(Means) 등의 뜻이 있다. 대체로 특정한 자세를 통해 몸과 마음을 수련하여 정신적으로 초월적 자아와 하나 되어 무아지경, 혹은 삼매경, 황홀경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렇다면 전통적인 요가의 목적은 무엇일까? 전통적인 요가의 목적은 프라크리티(Prakriti, 물질–감정, 생각, 몸, 계절 등 변화 가능한 것들)의 속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데에 있다. 자아가 프라크리티(Prakriti)로부터 절대적으로 독립되어 있다는 인식을 통해서 자아(自我)를 정신작용(精神作用)과 동일시하는 무지(無地)와 착각(錯覺)에서 벗어나 푸루샤(Purusa, 영, 순수의식)로서 참된 자아(自我)가 드러난다. 요가에서는 이러한 일련의 수행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개념을 말한다. 찟따 브리띠(동요)는 잔잔한 수면에 이는 물결과 같이 찟따(Citta, 생각)에 이는 작용이다. 찟따(생각)는 자아와 별개의 존재이다. 찟따는 파탄잘리에 의하면 붓디(고통), 마나스(마음), 아항까라(Ego, 자아의식)의 복합체인 내적 기관이다. 한마디로 요가 수행은 바로 이 찟따(Citta, 생각)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다. 즉, 찟따 브리띠(동요)를 소멸(消滅)하고 자아(自我)가 찟따(Citta)와 분리되도록 하는 데 있다. 파탄잘리 요가수트라에 의하면 여덟 단계의 통제가 있다고 알려진 요가가 바로 한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아쉬탕가(Astanga) 요가이다. 아쉬탕가의 ‘Astou’는 8을, ‘anga’는 단계를 의미한다. 아쉬탕가(Astanga)의 요가 8단계를 모두 수련하게 되며 몸과 마음의 불순함과 장애물이 모두 제거된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진실한 지혜나 지식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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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단계는 금계(禁戒:야마, yama)이다. 금계는 사회적 규범으로 불살생(不殺生)·성실(誠實)·부도(不盜)·정결(貞潔)·불탐욕(不貪慾) 등의 다섯 가지 계율이다. 이 5가지 계율은 우리가 지켜야 할 사항이자 타인을 대할 때 취해야 하는 자세이다.
진실함은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을 성공적으로 이끌 것이다. 탐하지 않음이 확립되면 모든 보석을 선물 받을 것이다. 금욕이 확립되면 활력이 넘칠 것이다. 집착과 붙잡고 싶은 마음을 극복할 때 그 사람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지식을 얻을 것이다. 요가수트라 2장 35~39절
제2단계는 권계(勸戒:니야마, niyama)이다. 다섯 가지 가르침을 규정하는 개인적인 규범으로서 청정(淸淨) ·만족(滿足) ·학습(學習) ·고행(苦行) ·헌신(獻身)이다. 자기 절제를 수련함으로써 불순함이 사라지고 신체와 감각기관은 영적인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정화를 통해 자기 자신의 육체적인 것과 외적인 것들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만족을 통해 궁극의 행복을 얻을 것이다. 자기 절제를 수련함으로써 불순함이 사라지고 신체와 감각기관은 영적인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요가수트라 2장 40~45절
이상 1, 2단계는 도덕률(道德律)로서 심신의 안정을 위한 요가 수련의 기본과정이다. 제3단계인 좌법(坐法:아사나, asana)은 요가체조를 말한다. 여기서는 동작을 취할 때 호흡을 일치시키고 자극이 미치는 곳에 정신을 집중한다. 즉, 호흡 ·동작 ·정신 집중이 삼위일체가 되는 마음과 신체의 통제라고 보면 된다. 인체의 기둥[柱]인 척추(脊椎) 전체를 자극해서 신경의 통제를 받는 각 기관의 활동을 임의로 조절할 수 있는 체위가 주가 된다. 이것은 긴장과 이완(弛緩)의 리듬을 원리로 한다.
좌법(아사나)은 확고하고 편안한 자세다. 요가수트라. 2장 46절
제4단계는 조식(調息:프라나야마, pranayama)이다. 4단계는 생리작용의 통제, 정식(正食) ·호흡법 등을 수련하는 과정이다. 들숨(흡식, 吸息)으로 우주의 정기(精氣:프라나, prana)를 섭취하고 숨을 참고 있는 지식(止息) 동안에 그것을 자기화(自己化)하는 특수한 호흡법이다. 이것은 정기 즉 우주의 에너지를 축적해 두었다가 신경 활동의 영양소로서 공급하는 것이다. 그래서 호흡 작용은 들숨과 날숨을 하거나 혹은 정지하거나 한다.
그것(아사나)이 얻어지게 되면, 들숨과 날숨의 움직임들이 조절되어야 한다. 이것이 호흡법이다. 호흡 작용은 숨을 내쉬거나 들이쉬거나 혹은 멈추거나 한다. 호흡은 공간, 시간 그리고 횟수에 의해서 조절되며 길거나 짧다. 요가수트라 2장 49~51절
제5단계는 제감법(制感法:프라티아하라, pratyahara)이다. 이 과정은 인간의 감각기능 중에서 선천적 중추(先天的中樞)인 간뇌(間腦)와 후천적 중추인 대뇌를 개발하는 것이 목표이다. 소위 육감·본능을 지배하는 간뇌의 개발에 중점적인 수행을 한다. 프라티야하라(pratyahara)는 마음을 조절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감각을 내면으로 가져와 오직 ‘나’에게 집중하고, ‘내’가 평온하고 행복할 수 있도록 한다.
감각들이 스스로 대상들로부터 물러나고 모방한다. 그것처럼 마음-재질의 본질을 모방할 때, 이것이 프라트야하라이다. 요가수트라 2장 54절
제6단계는 어떤 소리나 물체, 또는 신체의 특정부위 등을 대상으로 하여 그 대상에 마음을 결부시키는 다라나(dharana:凝念 또는 執持)로서 정신집중 또는 정신통일이라고 해석한다. 제7단계는 대상을 초월해서 무념(無念) ·무상(無想) ·무심(無心)이 되어 정려상태(靜慮狀態)가 되는 디아나(dhyana:瞑想)이다. 마음의 총체가 한 가지 혹은 한 장소를 목표로 해서 고정시켰을 때 이것을 집중(다라나) 상태라고 한답니다.
집중은 한 장소, 대상 혹은 생각에 마음을 고정하는 것이다. 명상은 그 대상을 향한 끊임없는 인식의 흐름이다. 요가수트라 3장 1~2절
최후의 목표 제8단계인 사마디(samadhi)이다. 이 경지(境地)는 소우주인 내[眞我]가 자연(대우주)과 하나로 통일되는, 즉 신아일치경(神我一致境)이다. 즉, 자아 속으로 의식을 몰입시키는 초 의식의 상태를 뜻한다.
요가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의 감각과 생각, 개념, 감정 등에서 우리 자신을 분리하는 것이다. 즉, 그 모든 것들이 자아(自我)의 본성에서는 이질적이고 비본질적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것들이 본질적인 자아에 뗄 수 없을 정도로 달라붙어 있어서 진정한 자아를 독자적인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을 터득하는 것이 요가 수행의 목적이다.
지금까지 인도 인문학 산책 12번째로 요가란 무엇인가? 을 산책해 보았다. 요가는 요가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운동, 다이어트 그리고 스트레칭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요가는 처음부터 종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고 종교 기반에 의해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요가학파에서는 요가를 수행하는 사람을 요기(Yogi) 또는 요가 행자(Yoga 行者)라고 부르고 수행 완성자를 무니(牟尼 · 聖者) 즉, 성자라 일컫는 이유이다. 불교의 창시자 부처조차도 요가 수행자인 듯하다. 요가의 본고장이고 요가의 발상지이면서 요기의 수도로 불리는 리시케시에서는 여전히 전 세계 요기들이 모인다. 여기는 히말라야 바로 아래 갠지스강이 시작되는 곳, 요가를 하기엔 최적화된 환경이다. 수백 개의 요가 아쉬람(yoga ashram, 명상센터)이 들어서 있다. 1968년 록 밴드 비틀스가 영적 여행을 위해 머무는 힐링 장소로도 유명하다. 필자가 보기엔 요가의 목표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주체와 객체의 구별이 없는 상태 즉, 우주와 현상이 해체되어 사라지고 대상의식(對象意識)이 없는 상태이다. 그리하여 대상(對象)에 속박되지 않는 그 경지(境智)를 말하는 듯하다. 마치 일본 교토학파가 말하는 절대무(絶對無)처럼 말이다. 외부적인 속박을 떠남과 동시에 내부적인 마음의 동요(動搖)를 멈추게 한다. 그래서 요가는 ‘정신’ 활동을 통제하고 여러 단계를 거쳐 결국은 그 작용이 멈추도록 하는 과정으로 구성되었다. 즉, 모든 정신적인 상태들의 정지(靜止)가 바로 요가이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엔 현재 한국에서 통용되고 요가는 정통요가라기보다는 상업화된 잘못된 요가가 유행하고 있는 듯하다. 요가는 단순한 건강법이 아닌 삶의 철학이자 과학이라는 요가 학자의 말을 귀담아들어야 할 때이다. 2024/8/19 뜨르/ 혜윰인문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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