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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인문학 여행 이야기 11– 벵갈루루: 인도 정원 도시와 실리콘밸리

by 뜨르 K 2024.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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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인문학 여행 이야기 11– 벵갈루루: 인도의 정원 도시와 실리콘밸리

 

 

필자의 인도 인문학 여행의 마지막 도시로 IT로 잘 알려진 벵갈루루이다. 인도 카르나타카주의 주도이자 IT산업의 중심도시로 칸나다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함에 따라 2014년 11월부로 과거에 사용하던 방갈로르에서 벵갈루루로 개칭했다. ‘인도의 정원 도시’라 불리는 벵갈루루는 카르나타카주의 주도로 해발 920m에 있는 고원 도시로 다른 인도 도시와 다르게 쾌적하다. 일찍이 남인도에서 강대한 권력을 장악한 마이소르 소왕국의 수도였다. 현재는 마드라스와 버금가는 남인도의 정치·경제의 중심도시로 인구가 1,200만을 넘는 대도시이다. 필자가 본 벵갈루루의 첫 이미지는 인도 다른 도시와 다르게 아주 깔끔하게 정돈된 인상을 준다. 전혀 인도답지 않게 말이다. 특히 영국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칸톤멘트는 녹음이 우거졌다. 걷는 사람들의 모습도 어딘지 모르게 인도에서 보는 다른 도시와는 다르다. 특히 젊은 여성들의 옷에서 사리보다는 청바지나 스커트를 입은 사람이 더 많다. 예부터 벵갈루루가 존재했던 도시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냥 작은 고을에 불과했다. 진흙으로 쌓아 올린 성과 4개의 망루가 전부였다고 한다. 마이소르 왕국의 왕인 무슬림 하이데르 알리와 그의 아들 티푸 술탄이 지배하던 18세기에서도 주로 군사 기지로만 이용했을 뿐 대도시는 아니었다.

 

그러던 벵갈루루 발전의 서막은 바로 영국 식민지 때부터였다. 인도의 무더운 날씨를 견디지 못한 영국인들이 약 해발 920m의 서늘한 고원지대를 발견하고 새로운 행정 중심 도시로 자리 잡게 된다. 1831년 영국 동인도 회사는 벵갈루루를 주둔지로 정하고 영국 통치 기간 군사 및 행정 중심지로 이름을 올렸다. 또한, 1927년과 34년에는 마하트마 간디가 활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1949년 오늘날 익히 알려진 “벵갈루루”시가 만들어졌다. 그 후 70~80년대 많은 남인도 출신 이민자들이 이주하면서 급속한 성장하게 된다. 이처럼 환경이 좋아서인지 현재 인도인의 가장 살고 싶은 도시 1위가 벵갈루루이다. 현재도 인구도 꾸준히 증가하여 현재는 약 1천2백만 명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뭄바이, 델리에 이은 인도에서 3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자 남인도의 경제 중심지이다. 벵갈루루의 또 다른 별명은 인도의 “가든 시티” 또는 “실리콘 밸리"”로 불리다. 아마 정원 도시이고 IT 기업이 밀집한 인도의 첨단기술의 중심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HP, Intel, IBM, 인포시스, Wipro와 같은 세계적인 대기업들을 포함하여 IT 기업의 80%의 2160가 벵갈루루에 있다. 세계에서 4번째로 큰 IT 클러스터를 형성하고 있다. 마치 필자가 현재 거주하는 전자도시 구미처럼 말이다. 하지만, 구미는 불행하게도 정원 도시는 아니다. 그 외 사원과 정원, 박물관, 그리고 궁전 등 다양한 볼거리가 존재한다. 또한, 인도의 전통 음악과 무용 등 다양한 문화를 맛볼 수 있는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현대 도시의 상징물인 쇼핑몰, 카페들도 즐비하고 서구 여느 대도시 못지않게 카페에서 노트북을 보는 젊은이들이 눈에 자주 띈다. 현재 주요 유적지로는 시티 마켓의 남쪽으로 병원 근처에 마이소르 왕국의 지배자인 티푸 술탄이 18세기에 건축한 궁전과 성벽 일부가 남아 있다. 고대 사원인 불 사원에서는 거대한 난디 상과 랄바 식물원을 볼 수 있다. 먼저 벵갈루루 요새와 궁전(Bengaluru Pete, Palace)으로 들어가 보자.

 

벵갈루루 역사의 시작점: 벵갈루루 요새와 궁전(Bengaluru Pete, Palace)

 

 

벵갈루루 중심부에는 벵갈루루 요새(Bengaluru Pete)가 있다. 벵갈루루의 역사는 지역 추장인 Kempe Gowda I에 의해 설립된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요새는 지역 추장이며 비자야나가라의 행정관으로 있었던 16세기 벵갈루루의 창시자인 켐페 고우다 1세(Kempe Gowda I, 1510~1569)가 건축했다. 이 건축의 특징은 인도 토착민의 양식과 유럽 스코틀랜드 양식이 완벽히 조화를 이루고 있는 튜더 양식이다. 영국의 윈저성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멋진 궁전의 아름다운 실내장식을 감상해 볼 수 있다. 이 궁전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졌다. 여기서는 마이소르의 전 통치자였던 와디야르 왕가의 생생한 생활 방식과 왕실 기념품, 그림, 그리고 호화로운 인테리어를 엿볼 수 있다. 특히 넓은 정원이 아주 매력적이다. 옛날 그대로 존재한 궁전 정원은 무려 55만 평에 이르고 오락 시설 펀월드(Fun World)와 워터슬라이드, 볼링장과 가상 레이싱 트랙 등도 있다. 가끔 콘서트도 열리는 아름다운 정원들로 둘러싸인 웅장한 벵갈루루 궁전(Bangalore Palace)의 탁월함을 엿볼 수 있다. 실내로 들어가면 아래층과 위층에 걸쳐 35개의 방이 있다. 궁전의 1층에는 튜더 양식의 장식으로 나무 들보와 부각 채색 그리고 신 고전 양식의 꽃 조각이 벽을 장식하고 있다. 대부분 빅토리아 시대와 에드워드 시대의 것이다. 또한, 2층에는 귀족 회의실 두르바 홀(Durbar Hall)이 있는데 왕가의 기운이 베어져 있는 듯하다. 여러 나라 작품들이 있는 미술품으로 채워진 방들도 있다. 다음 목적지는 마이소르 왕국의 통치자인 티푸 술탄 궁전으로 옮겨보자.

식민지 저항본부: 티푸 술탄 궁전(Tipu Sultan’s Palace)

 

 

시티마켓의 남쪽 병원이 모여 있는 지역에 마이소르 왕국의 통치자인 티푸 술탄 궁전이 있다. 물론 벵갈루루 요새 안에 있다. 이 호화로운 궁전과 함께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티푸 술탄의 통치 기간인 18세기에 건축한 것이다. 인도에서 보기 드물게 목조로 건축한 궁전으로 한때 전설적인 마이소르 왕의 여름 휴양지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 궁전은 2층 건물로 인도 이슬람 건축의 훌륭한 표본이다. 궁전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장식용 프레스코와 아름다운 모티브, 돌출된 발코니, 웅장한 아치 등이다. 티푸 술탄 왕자의 생활 방식과 삶을 엿볼 수 있다. 궁전은 원래 1537년에 지역 치프타인 켐페 고우다에 의해 건축되었다. 제4차 영국-마이소르 전쟁에서 티푸 술탄이 사망한 이후에는 영국 행정부의 사무국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 궁전 건물의 특징은 견고하고 습기에도 강한 티크 나무로 지어졌으며 기둥, 아치, 발코니로 장식되어 있다. 현재는 티푸 술탄 정부의 다양한 업적을 전시하는 작은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1층 구석에 4개의 작은 방이 있고 벽에는 아름다운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티푸 술탄이 직접 시각화한 거대한 왕좌의 그림과 초상화들도 눈에 띈다. 은과 금으로 장식된 티푸 술탄의 옷과 왕관도 보인다.

 

티푸는 1782년에 아버지인 하이데르 알리의 후계자로 마이소르의 술탄이 되었다. 그는 식민지저항의 상징이었다. 영국 동인도 회사의 지배에 강경하게 맞서기 때문이다. ‘마이소르의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제1차와 2차 마이소르 전쟁에서 영국군과 인도 연합군에 맞서 싸웠다. 1789년에는 프랑스군과 연합하여 영국 보호령인 트라방코르를 공격해 제3차 마이소르 전쟁을 촉발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1792에 티푸는 영국 콘월리스에게 패배당하고 벵갈루루를 빼앗겼다. 영토 반의 잃었다. 이러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마이소르 티푸 술탄은 나폴레옹 통치의 프랑스와 또다시 동맹을 맺고 4차 마이소르 전쟁을 일으켰고 1799년 티푸의 수도가 포위당하면서 성벽을 지키다가 영웅적인 죽음을 맞이하고 전쟁이 종결된다. 자신의 나라를 식민화하려는 세력에 완강히 저항한 인도 영웅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최근 경매장에서 옛날 인도 마이소르 왕국의 술탄이었던 “마이소르의 호랑이” 티푸 술탄의 보검이 런던 경매장에 등장하였는데 246억 원에 낙찰되었다. 이 보검은 영국군이 인도를 침략했을 때 티푸 술탄을 죽이고 약탈해왔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다음은 벵갈루루 난디 힌두사원(불 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바 신이 타고 다니는 황소: 벵갈루루 난디 힌두사원(불 사원)

 

 

벵갈루루 난디 힌두사원(불 사원)은 벵갈루루역에서 4km 정도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사원은 벵갈루루의 창설자인 캠페기우다(Kempegowda)가 세운 드라비다 양식의 힌두사원이다. 높이 4.5m에 폭 6m인 난디(황소신) 석상이 유명하다. 그래서 난디 템플(Nandi Temple)이라고 부른다. 벵갈루루의 인기 명소이다. 이 불상은 원래 검은색 불상이 아니라 회색 화강암 돌 하나로 조각되어 숯가루와 땅콩기름을 섞어 검은색으로 광택을 냈다고 한다. 난디(Nandi)란 힌두교 반(半) 신으로 성스럽게 여기는 소를 일컫는다. 거의 모든 시바 사원에는 일반적으로 본당 맞은편에 난디 석상이 있을 정도로 인도 사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여기서 난디 탄생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난디 이야기


옛날에 실라다(Shilada)라는 현자가 있었다. 실라다는 시바 신의 축복을 받은 아이를 입양하고 싶어 시바 신에게 기도하였고, 시바는 곧 원하는 아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계시를 내렸다. 다음 날 실라다가 집 앞의 밭을 가는데, 빛나는 아기를 발견했다. 실라다는 이 아기가 시바 신의 축복을 받은 아기임을 확신하였다. 실라다는 아기의 이름을 난디(Nandi)라 지었고, 베다를 비롯한 다양한 지식을 전수하는 한편으로 사랑과 정성을 다해서 키웠다.

수년 후, 실라다의 집에 두 명의 현자 미트라(Mitra)와 바루나(Varuna)가 방문하였다. 실라다와 난디는 두 현자를 정성껏 모셨다. 시간이 흘러 두 현자가 실라다의 집을 떠나게 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난디에게 축복을 내리려고 하였다. 난디는 두 현자의 발 앞에 엎드려 있어 보지 못하였지만, 실라다는 두 현자의 표정이 좋지 않았음을 눈치챘다. 그리고 두 현자를 따라가 연유를 여쭈었다. 두 현자는 난디가 훌륭한 재목이기는 하지만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하였다.

실라다는 사랑스러운 아들이 요절할 것이라는 이야기에 공황에 빠졌고 크게 상심하였다. 그리고 이 문제를 고민하다가 아들 난디에게 전했다. 크게 상심하고 슬퍼할 줄 알았지만, 오히려 난디는 자신은 시바 신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시바 신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라며 담담히 말하였다.

난디는 시바 신을 만나기 위해 부바나(Bhuvana) 강으로 가 고행을 시작했다. 난디의 고행과 집중이 매우 훌륭하여 시바 신은 곧 난디 앞에 현신하였다. 시바 신은 난디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물었다. 난디는 '저는 시바 신과 영원히 함께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시바는 '내가 여행할 때 함께 하던 황소를 방금 잃어버렸다. 그러니 난디 너는 소의 얼굴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너는 내 집 카일라스에서 함께 할 것이고, 나의 모든 가나(Anas)들의 수장이 될 것이다. 그리고 너는 영원히 나의 동반자이며, 나의 탈 것 그리고 나의 친구가 될 것이다. -난디의 탄생 이야기 요약-

 

그 외에도 필자가 방문한 적이 있는 베트남 포사누이 참탑에 얽힌 이야기로 베트남의 참족 힌두교도들은 자신들이 죽으면 난디(Nandi)가 그들의 영혼을 베트남에서 인도의 성지로 데려간다고 믿는다. 다음 목적지는 랄박 식물원 (Lalbagh botanical gargen)이다.

이슬람 정원의 상징: 랄박식물원 (Lalbagh botanical gargen)

 

 

이 식물원은 인도에서 가장 훌륭한 식물원으로 손꼽힌다. 식물원의 역사도 300년 정도 되었다. 이 식물원 역사는 18세기 이슬람 왕조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인도에 이슬람 왕조를 연 하이데르 알리와 그의 아들 티푸 술탄에 의해서 조성된 곳으로 알려졌다. 하이데르 알리와 그의 아들 티푸 술탄은 인도 전 지역에서 다양한 식물을 가지고 와서 이슬람 정원을 만들고 꾸몄다. 이슬람 정원은 일반 식물원과 다르게 종교 색채를 가진 정원이다. 이슬람에서 최초의 정원은 에덴동산이다. 또 정원에 해당하는 아랍어 Jannah는 일종에 낙원의 개념으로 사용한다. 이슬람에서 정원이란 곧 신의 뜻이 재현된 공간으로 여긴다. 그만큼 상징적으로 고안되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슬람권에서 정원은 어떤 공간일까? 쿠란에서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낙원에는 몇 개의 정원이 있고 그곳 우물에서는 물이 흘러넘치고 과일도 두 종류씩 열려 있다. 신자들은 비단으로 둘러쳐진 요에 드러누워 있고, 정원의 과일들은 마음대로 가질 수 있으며, 눈을 내리뜬 처녀들, 이제까지 어떤 남자의 손길도 닿은 적 없는 루비와 같이 사랑스럽고 산호처럼 아름다운 처녀들을 발견할 것이다.

 

푸르름이 가득한 목초지가 있고, 그곳에는 물이 흘러넘치는 우물과 과일과 야자나무 석류나무가 있고, 마음 착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처녀들이 있다. 시원한 집에서 사는 젊은 처녀들은 비단과 은팔찌로 꾸미고, 요에 드러누워 마치 흩뿌려진 진주 같다.

 

알리와 티푸 술탄 부자(父子)가 꿈꾸었던 아름다운 정원도 아마 그렇지 않았을까? 넓은 정원에는 남인도 자생식물과 열대 희귀 수목 등과 페르시아와 유럽에서도 희귀한 화초와 허브를 수집해서 심었다고 한다. 넓은 대지에 1천 여종이 넘는 식물과 백 년이 넘는 나무들이 즐비하다. 영국풍의 유리온실과 분수 등도 보인다. 알리 부자의 왕조는 영국군의 침입으로 짧은 기간 통치했지만, 정원은 인도를 대표하는 식물원이 되었다. 벵갈루루가 정원 도시로 불리게 된 것도 랄박 식물원 덕분이라고 할 정도이다. 랄박은 붉은 정원이라는 뜻이 있는데 1760년대 하이데르 알리가 정원을 처음 조성했을 때는 붉은 장미가 가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처럼 인도는 다양한 문화가 존재한다. 유일한 힌두교 문화만이 전부로 보이지만 사실은 이슬람 문화가 이슬람 통치만큼이나 인도 곳곳에 그 흔적들이 베여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도의 상징인 타지마할, 델리의 붉은 성, 아그라 성, 쿠트브 미나르 등 인도의 많은 문화유산이 이슬람에 의해 건축되었다. 이처럼 이슬람은 인도 힌두 못지않게 전통과 역사를 갖고 있었다. 이슬람은 힌두와 함께 인도의 주인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고 볼 수 있다. 벵갈루루 인문학 여행을 끝으로 인도 인문학 여행을 마치고자 한다. 인도하면 많은 단어가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소가 신성시되는 나라, 종교의 나라, 불평등이 존재하는 나라,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슬픈 나라, IT 강국, 요가의 나라, 찬란한 이슬람 문화 등은 인도만의 매력일 것이다. 여행 마지막에 다다라 필자에게 한 가지 아쉬움은 인도 여행 출발부터 인도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아직도 인도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지금 역시 필자는 인도를 여행하고 싶다. 2024/9/7 혜윰인문학연구소/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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