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산 인문학 여행: 우리 동네 산 금오산(金烏山) 정상에 오르다.
금오산 아래 사는 저 길충신은
천고에 높은 이름 귀신도 감동하네
십 년 만에 산 밖 길을 두 번 지나니
맑은 바람 어제인 양 행인을 스치네
(金烏山下吉忠臣 千古高名動鬼神 十載再經山外路 淸風如昨灑行人)
# 조선 전기 송순이 금오산을 보고 길재의 충절을 칭송하며 지은 한시이다.
필자는 금오산이 좋다. 아니, 금오산을 걷는 것 만에도 기분이 좋다. 토종 소나무가 빼곡하게 있어서 솔향이 그윽하기 때문이다. 걷다 보면 온몸이 힐링되는 듯 마음이 차분해진다. 금오산은 걷는 것도 좋지만, 등반도 멋진 일이다. 오늘은 금오산 정상에 올라가 보자. 금오산 정상에 올라가는 등산로는 보통 4곳이 있다. 그 외 코스도 있지만 말이다. 첫 번째는 가장 대표적인 등산로로 탐방안내소-대혜폭포-할딱 고개-내성-현월봉(정상), 2번째는 탐방안내소-대해 폭포-성안-현월봉, 3번째는 탐방안내소-법성사-,현월봉 4번째는 경상북도 환경연수원-칼다봉-성안-현월봉으로 올라가는 등산로이다. 필자는 탐방안내소-대해 폭포-내성-현월봉(정상)에 올라가서, 하산은 현월봉-약사암-마애보살입상-오형 돌탑-대해 폭포-탐방안내소 코스로 등반했다. 필자에게 가장 효율적인 등반코스로 보였다. 왜냐하면 등반하면서 필자가 좋아하는 장소와 유적지를 최대한 방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드디어 오늘은 금오산(金烏山) 정상에 올랐다. 보통 사람들은 산을 등반할 때 정상까지 올라간다. 하지만, 필자는 금오산 현월봉(정상)에 한 번도 오르지 못했다. 정상까지 오르는 데, 무려 20년 이상이 걸렸다. 물론 해발 400m 대해 폭포(일명: 명금폭포)는 자주 갔지만 말이다.
금오산의 원래 이름은 대본산(大本山)이다. 중국의 오악에 견줄만한 산으로 남숭산(남崇山)이라고도 하였다. 금오산이 1,000m 미만의 산이지만, 굳이 숭자(嵩字)를 붙여 중국의 유명한 쑹산에 비긴 것은 그 위용(偉容)과 품격이 비범한 데 기인한 듯하다. 지금의 금오산(金烏山)이라는 명칭은 삼국시대의 승려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지은 이름이다. 저녁노을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말이다. 신라에 불교를 최초로 전래한 스님이 바로 이 아도화상(阿道和尙)이다. 아도화상이 활동한 신라불교초전지가 구미 도개면에 있다. 그 옆 태조산에는 그가 세운 최초의 절 도리사(桃李寺)도 자리 잡고 있어 금오산이 한층 돋보인다. 구미 인동동 방면에서 금오산을 바라보면 금오산이 마치 능선이 마치 누워있는 부처의 모습으로 보인다. 그래서 금오산 와불(臥佛)이라고도 한다. 필자도 그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신라 말기 도선 대사, 조선 시대 무학대사도 금오산(金烏山)에 왕기가 서렸다고 하였다. 별로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비극이지만, 물론 총살당한 왕도 나왔다. 그 정도로 금오산은 좋은 산인 듯하다. 금오산은 예부터 경북 8경으로도 손꼽혀다. 아마 산에 기암절벽과 울창한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어 경관이 수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산세도 특이하다. 정상 인근에 고원 분지가 형성되어 있다. 해발 800m 지점에 말이다. ‘성안마을’이라는 촌락이 형성되었다. 실제로 해방을 전후해서 10여 가구가 살았다 한다. 물론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금오산(金烏山) 정상은 976m 현월봉이다. 탐방안내소에서 폭포까지는 대체로 평범한 등산로이다. 하지만, 대혜폭포에서 정상에 오르는 길은 쉬운 코스는 아닌 듯하다. 할딱 고개라는 최고의 난 코스도 있다. 너무 가팔라서 나무 계단을 지그재그로 얽혀 올라가도록 만들었다. 그 외 코스는 그야말로 지루한 돌 밭길이다. 능선도 없다. 일부 코스를 제외하고 나무로 가로막혀 답답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수행자처럼 묵묵히 가야 한다. 하지만, 정상에 오르면 모든 게 달라진다. 사방이 확 트이고 가슴도 확 트인다. 북동쪽으로 구미 시내와 낙동강이 보인다. 동쪽으로 구미 국가공단이 보인다. 장관이다.!! 정상에 더 머물고 싶지만,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다. 일정은 우리를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산은 두 길이 있다. 한 길은 올라온 길이고, 다른 길은 약사암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물론 필자는 약사암 방향을 선택했다. 현월봉에서 조그만 암벽 사이로 내려가면 약사암이 있다. 신라 시대에 창건된 작은 절이다. 기암절벽 아래에 남향으로 암벽 벼랑 끝에 지지대를 세워 만든 절이라고 한다. 주변이 암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절의 운치가 한층 돋보인다. 약사암 지나 급경사를 거처 산허리를 지나면 거대한 자연 암벽이 눈에 띈다. 바로 보물 제490호 금오산(金烏山) 마애보살입상이다. 5.5m 높이의 거대한 암벽 조각이다. 자연 암벽의 돌출 부분을 이용하여 좌우를 나누어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다고 한다. 마애보살입상 근처에는 한 할아버지가 죽은 손자를 위해 만든 오형 돌탑이 있다. 30여 개의 돌탑과 돌 조형물들이 눈에 띈다. 할아버지가 금오산 ‘오’와 손자의 이름 ‘형’ 자를 딴 오형 돌탑이라는 이름이 지었다고 한다. SBS ‘세상에 이런 일’에도 소개되었다. 사연인즉, 뇌 병변 장애를 갖고 태어난 손자가 10살이 되던 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손자를 잃은 한 할아버지가 손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돌을 쌓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손자를 기렸다. 한눈에 보아도 정성을 들여 조성한 듯하다.
그 외 금오산에는 필자가 옛날에 가 본 적이 있는 북쪽 계곡의 중턱에 도선굴이 있다. 도선굴은 천연 동굴이다. 도선굴로 들어가는 길이 매우 가팔라서 주의해야 한다. 도선굴은 암벽에 뚫린 큰 구멍 때문에 대혈(大穴)이라고도 했으나 신라말 풍수의 대가 도선 대사가 득도했다 해서 도선굴이라고 불렀다. 또한, 도선굴은 고려의 대각국사와 야은 길재 등이 들어와 은거할 만큼 적막한 절경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인근 향인(鄕人)이 난을 피해 암벽의 틈에 기어오르는 칡덩굴을 잡고 이 굴에 들어와 세류폭포(細流瀑布)의 물을 긴 막대로 받아먹으면 피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인원이 연 무려 100여 명이었다고 한다. 대해 폭포 가는 길목에는 신라의 승려 도선(827-898)이 세웠다는 해운사가 보인다. 그때 당시 절 이름은 해운사가 아니고 대혈사(大穴寺)였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고 그 뒤 1925년 철하스님이 복원하고 절 이름을 해운암(海雲庵)으로 지었다가 대웅전(大雄殿)을 건축하고 해운사(海雲寺)로 바꾸었다. 고려 말에 길재(吉再:1353-1419)가 이 절에 은둔(隱遯)하며 학문에 정진했다고 알려진 곳이다. 이것이 훗날 영남학파의 주춧돌이 되었다. 또한, 조선 초기의 문인, 학자이자 불교 승려이며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도 충절을 지키며 금오산에서 은거하였다. 그래서 금오산을 필봉(筆峯)이라고 하는가 보다. 이는 선산 방면에서 보면 금오산 산마루가 마치 붓끝 같다고 해서란다. 그래서인지 구미(선산) 지방에는 문인(文人), 선비 등 인재가 끊이지 않았다.
조선 성종(成宗) 때의 문신 성현(成俔)은 그의 저서 용재총화에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朝鮮人材 半在 嶺南이요 嶺南人材 半在 善山)”라 하였고, 그 후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서도 비슷한 언급을 했다. 이는 금오산 정기(精氣)가 심상치 않다는 의미인 듯하다. 해운사(海雲寺)를 올라가기 전에는 금오산성이 있다. 정상 현월봉을 둘러싼 비교적 평탄한 곳에, 왜구 침략을 막기 위해 금오산성(金烏山城)을 축조하였다. 금오산성(金烏山城)은 외성과 내성이 구분하는데, 문헌에 의하면 아마 내성은 고려 말에 먼저 축조했고 외성은 조선 인조 17년에 수축한듯하다. 성(城)은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금오산성 전체 둘레는 약 3,500m이다. 남문·서문·중문·암문(暗門) 있고 현재도 건물터가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는 중요한 국방의 요충지로 역할을 하였고 조선 영조 대는 군병 3,500명이 상주할 정도로 대규모 산성이다. 이처럼 금오산은 산의 아름다움을 물론이고 역사적 흔적, 군사 요충지로서 어느 산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여담이지만, 원래 금오산 정상인 현월봉에는 올라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주한미군 통신기지가 있었기 때문이란다. 그 문제는 모두 해결되었고, 아무튼 지금은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다. 다행이다. 하지만, 아쉬움도 있다. 정상 현월봉에 올라가 보면, 여전히 각종 방송 중개소가 자리 잡고 있다. 보기 좋지는 않다. 자연스러운 산마루를 기대했건만, 문제는 산등성이 아름다운 자태를 온전히 감상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산은 모든 사람의 자연적 공유부이다. 산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아니, 우리 모두의 것이다. 하지만, 특정 사람이나 단체에 그 자리를 점령당하면 산은 슬퍼할 듯하다. 특히 금오산은 우리나라 제1호 도립공원이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있는 그대로 보존했으면 한다. 예로부터 금오산은 뛰어난 산세와 경관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지고(至高)의 덕(德)을 지닌 산으로서도 칭송받았다. 필자는 오늘도 우리 동네 산 금오산(金烏山)에 오른다. 2024/10/16 뜨르/ 혜윰인문학연구소
금오산의 별칭들
별칭 1: 남숭산(南嵩山) - 중국의 오악(五嶽)
금오산의 원래 이름은 대본산(大本山)이었는데 고려시대에는 남숭산(南嵩山)이라 하였다. 그 유래는 중국의 황하강 유역 하남성(河南省)에 중국 오악(五嶽) 중의 하나로 유명한 숭산(嵩山)과 생김새가 흡사하여 남숭산이라 명명하였고, 남쪽에 있다 해서 남숭산이라 부른 것이다. 특히 황해도 해주에 북숭산을 두어 남북으로 대칭(對稱)케 되었다. 고려 시대 문종(文宗)은 왕자를 출가시켜 이 남숭산에서 수도(修道)하게 하였는데, 그 왕자는 훗날 대각국사(大覺國師)로 봉해져 호국불교의 포교와 국정 자문에 임하였으니 남숭산의 품격과 위상이 역사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금오산은 1,000m를 넘지 않는 산이지만 굳이 숭자(嵩字)를 붙여 중국의 유명한 숭산에 비겨 말하는 것은 이처럼 그 위용(偉容)과 품격이 비범한 데서 기인되었다고 여겨진다.
별칭 2: 소금강(小金剛)과 수양산(首陽山)
금오산은 암석으로 골짜기마다 남성적인 기상이 넘치는 기암괴석(奇岩怪石)으로 힘과 기백(氣魄)이 서려 있고, 빼어난 경관을 갖추고 있어 옛 선현(先賢)들은 소금강(小金剛)이라고 불렀다. 또한 중국의 수양산에서 고사리로 연명하다 굶어 죽은 백이숙제(伯夷叔齊)이야기와 야은(冶隱) 길재(吉再)선생의 충절을 기려 수양산(首陽山)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칠곡군 숭산리의 순국의사(殉國義士) 만송(晩松) 유병헌(劉秉憲)선생의 문집에 따르면 "선비들이 다 사모하는 수양산 기슭에다 내 시신을 묻어다오" 라고 유언(遺言)을 할 정도로 선비들 사이에서는 수양산으로도 통용(通用)되어 왔다고 전한다.
별칭 3: 필봉(筆峯)
선산 방면에서 보면 상봉(上峯)이 흡사 붓끝 같다고 해서 필봉(筆峯)이라 하였는데 그로 인해서인지 선산지방에는 인재가 많이 배출되어 문인(文人), 달사(達士), 명필(名筆)이 대(代)를 끊이지 않았다. 조선조 성종(成宗)때의 문신 성현(成俔)은 그의 저서 용재총화에 "조선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朝鮮人材 半在 嶺南이요 嶺南人材 半在 善山)"라 하였고, 그 후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서도 그와 같이 언급되었으니 이는 모두 금오산 정기(精氣)의 영험(靈驗)이라는 평가도 있다.
별칭 4: 귀봉(貴峯) 거인산(巨人山)
구미시 인동 방면에서 보면 부처님이 누워있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와불산(臥佛山)이라고하여 귀인과 대작(大爵)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귀인이 관(冠)을 쓰고 있는 모습 같다 해서 귀봉(貴峯)이라 칭하기도 하였고, 또한 마치 거인이 누워 있는 모습같다고 해서 거인산(巨人山)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별칭 5: 귀봉(貴峯) 거인산(巨人山)노적봉(露積峯)
김천방면에서 보면 부잣집 노적가리 같다고 해서 노적봉(露積峯)이라 하였는데 실제로 옛부터 이 지방에는 큰 부자(富者)가 많았다.
별칭 6: 적봉(賊峯) 등 그 외의 별칭
김천시 개령면 방면에서 보면 큰 도둑이 무엇을 훔치려고 숨어서 노려보고 있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적봉(賊峯)이라 하였으며, 성주군 방면에서 보면 여인네가 산발한 모습 같다고 해서 음봉(淫峯)이라 하였다. 이런 많은 별칭들은 금오산의 위용(威容)과 준엄(峻嚴)한 자태에 대한 선인(先人)들의 애정이 담겨진 것으로 해석된다.
(구미시청 홈페이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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