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혜윰인문학▣/인문학여행

인도 인문학 산책 11: 우파니샤드(Upanisad)란 무엇인가?

by 뜨르 K 2024. 7. 15.
반응형
인도 인문학 산책 11: 우파니샤드(Upanisad)란 무엇인가?

 

이번 주제는 우파니샤드란 무엇인가이다. 우파니샤드는 고대 인도의 철학서로서 인도 사상의 원천으로 일컬을 만큼 아주 중요한 문헌이다. 대략 기원전 7-5세기에 만들어진 문헌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철학책이다. 성서보다 800년, 코란보다 1300년 앞선다. 인도에서 아리아인들의 성스러운 경전으로『베다』를 꼽는다. 그래서 브라만(Brahman) 교의 성전을『베다』라고 말할 정도이다. 『베다』는 인도가 자랑하는 일종에 계시서이다.『베다』에는『리그베다 Rig Veda 』외에 『사마베다 Sama Veda』,『야주르베다 Yajur Veda』,『아타르바 베다(Atharva Veda)』의 네 가지 베다가 있다. 각 베다는 신의 찬가 모음집인 본집(本集)과 브라마나(Bramana) 그리고 우파니샤드(Upanisad)로 이루어져 있다. 우파니샤드는『베다』를 구성하고 있는 마지막 부분으로 베단타(Vedanta)라고 불린다. 베다의 말미, 베다의 결론, 베다의 극치, 베다의 최고봉이라고도 해석하였다.『우파니샤드』는 형식적 계보로는 베다를 계승한 것이라고 하지만 초기 베다와는 실질적으로 그 내용과 어조가 매우 다른 자아 탐구에 관한 내용으로 거의 독립적인 문헌으로 보인다. 보통『우파니샤드』의 뜻은 산스크리트어에서 ‘우파(upa)’는 가까이, ‘니(ni)’는 아래로, ‘샤드(shad)’는 앉는다는 뜻으로 곧 ‘스승의 발밑에 앉아서 전수(傳受) 받은 가르침’을 뜻한다. 이것은 이 책의 내용이 매우 비밀스럽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듯하다. 마치 스승이 제자에게 가까이 앉아서 중요한 지혜의 비밀을 전달해 주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이루어지는〖비의(祕義)〗를 가리키며 일종의 비의(祕義) 문헌이라는 뜻이다. 우파니샤드에서 절대 진리란 ‘네티 네티(neti neti)’이다. 즉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다’라는 ‘부정의 부정’을 통해서만 인식된다고 이야기다. 해탈의 방정식도 참으로 난해한데 역설적으로 그만큼 절대 진리 혹은 해탈에 이르기 어렵다는 말이 아닐까. 그래서 스승과 제자는 숲 속에 마주 앉아 브라만에 이르는 진리를 좇아 부정의 부정이 마침내 긍정에 이를 때까지, ‘네티 네티(neti neti)’라는 비밀스러운 대화를 이어갔을 것이다.

 

현재 존재하는 우파니샤드는 200종 이상이다. 그중에서 가장 역사적 가치가 있고 내용도 중요한 14편과 17편을《고(古) 우파니샤드》라고 말한다. 이것은 대략 기원전 500년 전후 수백 년간을 걸쳐서 성립한 것으로 보인다. 그중에서도 『브리하드 아라니야카 우파니샤드』,『챤드 기야 우파니샤드』의 2편이 대표작이다. 이후에 나온 우파니샤드를 묶어《신(新) 우파니샤드》라고 부른다. 우파니샤드 탄생 배경은 이렇다. 기원전 500년에 인도의 종교와 사회는 빠르게 변화했다. 도시가 등장하면서 상인 계급이 생기자 기존 카스트에서 브라만(Brahman)의 권위가 추락하고 부처와 같은 가르침이 관심을 받으면서 다른 힌두 경전보다 우파니샤드 같은 경전이 생기게 되었다. 우파니샤드는 수백 년의 동안 여러 사람의 손을 걸쳐 완성되어서 상호 모순되거나 잡다한 내용이 혼재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주로 대화ㆍ문답 형식으로 구성된 우파니샤드의 중심사상으로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을 꼽을 수 있다. 이 사상은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칠 정도로 우파니샤드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범(梵)과 아(我)가 순수한 인식주체인 일종에 일원론적으로 만물의 근본 원리인 대우주의 본체 브라만(Brahman)과 소우주 개인의 본체 아트만(Atman)이 동일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범아일여’(梵我一如)이고 해탈이다. 주체와 대상이 구분되지 않는 것이 그 근원의 ‘대진리’와 ‘나’가 완전히 하나가 되는 만남이다.《우파니샤드》에서 현자들이 명상을 통해 자연(우주)과 인간이 하나임을 깨닫는 이유이다.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은 후에 베단타학파로 계승되고, 인도에서 가장 유력한 사상이 되었다. 그러면 우파니샤드 사상을 직접 책 본문 통해 접근해 보자.

 

《찬도갸 우파니샤드》 제6장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 나온다. 스베타게투(Shvetaketu)는 스승의 집에서 12년 동안 머물면서 모든 베다를 공부했다. 그 후 그는 오만해져 자신을 현인(賢人)으로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좀처럼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우달라카(Uddalaka)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스베타게투(Shvetaketu)야 너는 무엇을 배웠기에 너 자신이 그토록 현명하다고 생각하느냐? 너는 일단 그것을 알면 다른 모든 것도 알게 되는 것에 알고 있느냐? 네가 일단 철(鐵)이 무엇인지 알면, 철로 만들어진 모든 것을 알게 된다. 그것들은 본질이 단지 철뿐이기 때문이다. … 그 많은 이름과 형태들 속에서 자기 자신을 현현하고 있는 것은 그 본질, 곧 철뿐이다. … 바다로 흘러 들어간 강물이 그의 개체성을 잃어버리고 전체 바닷물과 구분할 수 없게 되는 것처럼, 갈라져 나온 모든 개체가 이 같은 지고의 존재, 그들 모두가 샘솟아 나온 궁극 실재 안에 녹아들어 가 개체성과 독특성을 상실하는 것이다. … 참나무가 작은 씨앗의 하나를 쪼개 열었을 때 그 안에는 우리가 주목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씨앗의 미세한 배(배) 안에는 커다란 참나무가 담겨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 전의『베다』의 가르침과 달리 『우파니샤드』는 외부의 신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신을 찾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희생제가 아니라 모든 것을 내재한 신성한 힘의 원천인 브라만(Brahman)을 찾으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기존의 아리안의 성자들이 제의가 신의 뜻을 반영한 것이라면 아트만(Atman)의 개체적 영혼 안에 브라만(Brahman)이 들어 있다고 본 것이다. 즉, 신적 교감의 의례적 의식이 아니라 영혼의 내재적인 문제로의 변화이다. 우파니샤드 최고의 관심은 윤회의 쳇바퀴에서 벗어나 모크샤, 영원한 자유를 얻는 데 있다. 이는 명상과 요가 그리고 고행을 통해 가능하다. 여기서 아트만(Atman)이 브라만(Brahman)과 하나가 되는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을 만들어 냈다. 우파니샤드에서 윤회는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사람이 죽어 화장되면 먼저 달에 들어가고, 비가 되어 땅에 내려오고, 그 비가 음식이 되고, 그 음식이 남자의 몸에 들어가 정자가 되고, 그 정자가 모태에 들어가 다시 태어난다. 사람이 죽어 어떠한 세계에 가는가는 이 세상에서 지은 업에 따라 결정되며, 브라만(Brahman)과 아트만(Atman)을 자각하여 해탈한 사람은 죽어서 범계(梵界)에 들어가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지만 해탈하지 못한 사람은 끝없이 윤회를 반복한다..

 

《케나 우파니샤드》에 이런 질문이 있다. “누구의 의지로, 그리고 누구의 지시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는가? 누구의 지시 때문에 생명이 시작되는가? 누구의 의지 때문에 언어기관이 움직이고, 누구의 이끎으로 눈과 귀는 각기의 대상을 인지하는 기능을 하는가?” 이에 이런 대답이 있다.

 

“언어기관, 눈, 귀, 마음, 그리고 생명의 작용은 ‘그’(主)로 부터 각기 능력을 받아 얻은 것이다. 그는 생각 중의 생각이고, 마음 중의 마음이고, 생명의 중의 생명이다. 마음, 눈, 귀, 말, 그 어느 것도 그에 관하여 우리에게 말해질 수 없다. 마음, 눈, 귀, 말, 그 어느 것도 그에게 도달할 수 없다. 단지 그만이 이 모든 기관을 통한 작용의 주관자이다. 눈을 의지하는 자가 되게 하고, 귀를 들을 수 있는 자가 되게 하고, 마음을 생각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하고 생명을 살아가는 힘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본성은 이런 감각기관 중 그 어느 것도 파악할 수 없다.”

 

여기에서 전능한 주로서 브라만(Brahman)의 위대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 예로 불의 신 아그니(Agni), 바람의 신 바유 (Vayu), 인드라(Indra)에게 능력을 테스트해 보았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실패했다. 오직 브라만(Brahman)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함으로 주(主)는 브라만(Brahman)이라는 것이다. 불이나 바람 등 여러 신의 능력은 모두 브라만(Brahman)에게서 왔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카파 우파니샤드》에서도 이 모든 세상이 주(主)에 의해 유지된다고 설명한다. 《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 그를 모든 것의 조정자, 주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그는 모든 것의 창조자이면서 통제자이지만 그가 창조하고 통제하는 다양한 이름과 형태를 가진 이 우주의 모든 것이 또한 그 자신이기도 하다. 마치 바람과 불이 서로 다른 형태로 나타나듯이 말이다. 우파니샤드에 대한 주석 가들의 논쟁은 거의 1천2백여 년 동안 계속해왔다. 어떤 사람들은 오직 브라만(Brahman)이 유일한 실재이며 나타나는 다른 모든 것은 거짓이고 환영일 뿐이라는 사실이『우파니샤드』가 가르치는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우파니샤드』가 지고(至高)의 존재(God) 안에 인간이 있고 인간 안에 지고 존재가 있다는 이원론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우파니샤드의 진리는 어떤 감각을 통해서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론이나 추론적 사고, 토론, 학식, 학위, 심지어 경전을 통해서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문다가 우파니샤드』에서도 진실과 절제, 영적인 열정, 그리고 모든 성적 욕만의 완전한 종식을 이룰 때 이 같은 진실한 자아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할 정도다. 우파니샤드 본문을 직접 읽어보자.

 

모든 생명체는 누구에 의해 감화받고 말을 하는가?
눈과 귀 뒤에 누구의 힘이 숨어 있는가?

귀의 귀
마음의 마음
말의 말
바로 그가 숨의 숨이요
눈의 눈이라.

말로써 표현될 수 없으나
그로 인해 말이 표현될 수 있으니
그대여, 바로 그가 브라만(Brahman)인 것을 알라.
이 세상 사람들이 숭배하는 것
그것은 브라만(Brahman)이 아니다.

『께나 우파니샤드』

 

그가 모두를 알게 하니 그를 무엇으로 할 수 있단 말이오? 우리가 알게 하는 자를 알 수 있겠소?

『브리하다란야까 우파니샤드』

 

“저 보리수나무에서 열매 하나를 따 오너라.”
“여기 따 왔습니다.” “그것을 쪼개라.”
“예, 쪼갰습니다.”
“그 안에 무엇이 보이느냐?”
“씨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를 쪼개 보아라.”
“쪼갰습니다.”
“그 안에 무엇이 보이느냐?”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계속해서 말했다.

“총명한 아들아, 네가 볼 수 없는 이 미세한 것, 그 미세함으로 이루어진 이 큰 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보아라.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그것이 있음을 믿어라. 아주 미세한 존재인 그것을 세상 모든 것들은 아트만(Atman)으로 삼고 있다. 그 존재가 곧 진리이다. 그 존재가 곧 아트만(Atman)이다. 그것은 바로 너이다. 슈웨따께뚜야."”

“이 소금을 물에 담그고, 내일 아침에 와 보아라.”

아들은 그대로 했다. 아침이 되자 아버지는 아들 슈웨따께뚜에게 말했다.

“네가 어젯밤에 담가 두었던 소금을 꺼내라.”

아들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소금을 찾을 수 없었다.

“총명한 아들아, 소금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소금은 그대로 그 안에 있다. 이제 맨 위 표면에 있는 물의 맛을 보아라. 맛이 어떠냐.”
"짭니다."
"그럼 중간의 물을 맛보아라."
"짭니다."
"자 그럼 이제 맨 밑바닥에 있는 물의 맛을 보아라."
"짭니다."
"그래, 그 물을 버리고 다시 내게 오너라."
"……."
"네가 그 존재를 볼 수는 없었지만, 그 존재는 여기 있는 것이다. 여기 있는 것이다. 그 아주 미세한 존재, 그것을 세상 모든 것들은 아트만(Atman)으로 삼고 있다. 그 존재가 곧 진리이다. 그 존재가 곧 아트만(Atman)이다. 그것은 바로 너이다. 슈베따께뚜야."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6:12-13

 

위의 보리수 씨앗의 비유에서처럼 궁극 자의 문제는 우파니샤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화두이다.『찬도기야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철인(哲人) 웃달라까는 다섯 명의 학자들이 궁극자(窮極者)에 관해 묻고자 자신을 찾아온다. 하지만 자신보다 아슈와빠띠왕이 설명을 더 잘할 수 있는 분이라며 왕에게 데리고 간다. 왕은 각자의 생각을 먼저 묻는다. 첫 번째 학자는 궁극자(窮極者)가 천계(天界)와 같은 것이 아니겠냐고 말한다. 두 번째 학자는 태양, 세 번째 학자는 공기, 네 번째 학자는 대공(大空), 다섯 번째 학자는 물, 웃달라까는 땅과 같은 것이 아니겠냐고 각각 대답한다. 그러자 왕은 그들에게 전체 중 일부만을 생각하고 이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비유하자면, 천계는 궁극자(窮極者)의 머리로 태양, 공기, 창공, 물이고 발은 각각 그의 눈, 호흡, 몸통, 방광, 발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모두는 궁극자(窮極者)가 아니지만, 궁극자는 ‘존재(存在)하는 자’이며 ‘생각하는 자’로서 이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보면 세상의 그 어떤 부분도 궁극자와 관련 없는 부분은 없다는 말이다. 존재(存在)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주체(主體)도 여기에 해당한다.

 

찬도기야 우파니샤드에는 수행자가 절대 진리인 브라만(Brahman)에 이르는 세 가지 수행 방법이 제시돼 있다.

 

먼저 제례 의식과 베다의 연구 그리고 나눔의 길이다. 이는 수행의 첫 번째 과정인 가주기(家住期·본인 집에 머물면서 연구하는 시기)에 해당한다. 두 번째는 스승의 집에 머물면서 거룩한 지혜를 추구하는 학습기(브라흐마차린)다. 세 번째는 스승의 집에서 금욕적으로 자기 자신의 육체를 엄격히 통제하는 것으로 숲 속 수행기(바나프라스타)다. 이렇게 수행함으로써 비로소 마지막 단계인 초탈기 또는 유행기(遊行期·파리브라자카)의 삶을 시작한다. 이때 방랑 고행자의 삶을 시작하게 되는데, 인도의 성자를 상징하는 ‘산야신(sanyasin)’이 바로 이들 방랑 고행자다. 불멸의 삶에 도전하는 산야신은 오늘날에도 인도의 상징과 같은 존재다. 『만두끼야 우파니샤드』에서는 궁극자(窮極者)와 인간 의식의 문제를 다루었다. 여기에서는 의식을 네 단계로 설명한다. 그 첫 번째는 깨어 있는 상태이다. 이는 외부 세상을 표면적으로 파악한다. 감각기관과 마음이 활동한다. 두 번째 상태는 꿈을 꾸는 의식의 상태이다. 첫 번째 상태보다 미세한 것들을 향유(享有)하며 깨어 있는 상태의 경험으로 새로운 형태의 세계를 만든다. 세 번째는 꿈 없이 숙면하는 상태이다. 꿈도 꾸지 않고 아무런 것도 욕망하지 않은 순수한 무의식의 상태 말이다. 즉, 깊은 수면 상태를 말한다. 바로 최상위이다. 네 번째는 뚜리야(Turiya)이다. 일종의 초월의식이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순수한 인식, 의식 자체를 말한다.

 

우파니샤드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을 정리하면 대략 이렇다. 우리가 아는 베다의 신으로는 비와 번개의 신 인드라, 불의 신 아그라, 태양의 신 수리아, 달의 신이자 신의 신비로운 음료인 소마, 바람의 신 바유 등이 있다. 이외에도 모든 자연이 신이다. 강의 신, 하늘의 신, 땅의 신, 원숭이 신, 개구리 신, 쥐 신도 있다. 하지만 우파니샤드에서부터 브라만(Brahman)이 등장한다. 힌두교의 신들은 브라만(Brahman)으로 귀일 한다는 말처럼 브라만(Brahman)은 우주의 중심이자. 우주 전체를 주재하는 보편적 실재이며 우주의 궁극적 원리이다. 브라만(Brahman)은 총체적 신성이고 존재 아닌 존재로 보면 된다. 마치 범신론(Pantheism)처럼 말이다. 우파니샤드에서는 브라만(Brahman)과 함께 또한 아트만(Atman)이 나온다. 우파니샤드의 세계창조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천지의 시초에는 다만 인간의 모양을 한 자아만 있었다. 그가 몸의 주변을 돌아보았을 때 자아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는 처음으로 입을 열어 ‘이것은 아함(나)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아함(아)’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

 

이렇게 형성된 자아를 푸루샤(Purusa)라고도 하고 아트만(Atman)이라고도 한다. 브라만(Brahman)을 보편적인 실재 신성이라면 각 개체 속에 현존하는 신성이 아트만(Atman, 참 자아)이다. 그러므로 우주의 궁극적인 원리가 하나하나 발현된 것이 아트만(Atman)이고 브라만(Brahman)은 곧 아트만(Atman)과 같은 것이다. 이것을 한자 성어로 범아일여(梵我一如)라고 한다.

 

지금까지 고대 인도 철학의 핵심 우파니샤드가 무엇인가? 을 더듬어 보았다. 우파니샤드는 베다와 함께 인도 사상의 원천이다. 수천 년을 걸쳐 전해 내려온 인도 고대 철학의 메시지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이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인생의 지침서가 되는 듯하다. 나는 누구인가? 물질로 구성된 육체가 나인가? 아니면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나인가? 아니면 내가 따로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세상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 와 같은 물음과 이런 물음을 자유롭게 탐구(探求)하면서 답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의미에서 어찌 보면《우파니샤드》는 인간의 자기 발견에 대한 기록이다. 여기에는 깊고 풍부한 영감과 직관적인 예지가 무궁무진(無窮無盡)하다. 한 예로《우파니샤드》에서는 사람에게 세 가지 몸이 있다고 말한다. ‘물질적인 몸’은 육체이다. ‘영혼의 몸’은 물질의 몸을 가지고 행한 모든 행위에 대한 기억이 있는 몸이다. 이 몸은 윤회의 주체이기도 하다. 또한, ‘근원적인 몸’은 물질적인 몸과 영혼의 몸이 아무리 많은 변화를 경험해도 본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몸이다. 이것이 바로 참 자아 아트만(Atman)이다. 베다가 이성적인 하나의 지식이라면 우파니샤드는 직관적인 지혜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해석이 어려운듯하다. 프로이트 및 융의 심리학과 실존철학에 영향을 끼친 쇼펜하우어는《우파니샤드》를 늘 옆에 끼고 잠자리에 들 때마다 습관적으로 읽었다고 한다. 영국의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작가 올더스 헉슬리는《우파니샤드》의 사상을 마르지 않는 철학이라고 찬양하였다. 정신을 물질보다도 중시하고 직관을 중시하는 초월론을 주장한 미국의 사상자 겸 시인 에머슨은 미국 철학에 동양사상 우파니샤드를 접목하게 시키고 심취했다. 이처럼 고대 인도 우파니샤드는 후대에 여러 철학에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파니샤드》는 누가 썼는지 언제 썼는지 아무도 모르는 책이다. 그런데도 후대 인문학에 아주 큰 영향력을 미쳤다는 사실에 필자는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2024/7/14 뜨르/ 혜윰인문학연구소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