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기의 교실 밖 인문학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멀리 볼 수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아이작 뉴턴-
이 글은 책의 서두에 쓰여 진 글이다. 새겨 봄직한 말이다. 여전히 우리는 인문학을 공부할 때 인문학을 왜 공부하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 때가 있다. 그 이유는 당장 인문학을 배우고 학습한다고 하더라도 삶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문학 열심히 공부하다고 당장 경제적으로 어떤 이득을 가져오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천천히 되새겨 보면 인문학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인문학 읽기를 통하여 삶의 통찰력과 사유의 시야가 넓어질 수 있고 사물과 문맥의 행간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물과 문맥의 행간을 읽을 수 없다면 사물의 본질에 다다를 수 가 없을 뿐만 아니라 글의 정확한 해석도 할 수 없다. 문맥의 정확한 해석을 하지 못한다면 그 글을 오독(誤讀)할 수밖에 없다. 오독(誤讀)의 결과는 잘못된 편견을 낳고 잘못된 편견은 잘못된 사상을 잉태한다. 참으로 무서운 연쇄고리이다. 그래서 혹자는 문맥의 행간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기준으로 진보적인 사람과 보수적인 사람으로 분류한다. 진보적 사람은 문맥을 아는 사람이고 보수적 사람은 문맥의 행간을 모르는 사람이다. 문맥의 행간을 아는 사람은 진보적 색책을 뛸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전적으로 맞다 고는 볼 수 없지만 일정량 일리가 있는 말이다.
실례로 우리는 기독교에서 성서 문자 무오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대부분 보수주의 기독교인임을 알 수 있다. 반대로 진보적 기독교인들은 성서의 문자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문맥의 행간과 행간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읽으려고 한다. 책을 읽는 독자의 몫은 그 책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서는 문맥의 행간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책에서 말하고자하는 의미를 포착할 수 있다. 만약 문맥을 모르는 상태에서 책을 읽는다면 책의 의미가 왜곡되거나 곡해된다. 이런 의미에서 『최진기의 교실 밖 인문학』은 문맥의 행간을 읽을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또한 우리가 어떤 분야의 책을 읽기 전에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 분야의 책의 숲을 보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문학의 초보자가 플라톤의 『대화론』, 칸트의『순수이성비판』등은 읽기가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인문학의 숲을 보고 이 바탕 위에 구체적인 책에 접근한다면 보다 더 쉽게 그 책을 이해할 수 있다.
『최진기의 교실 밖 인문학』은 인문학의 숲을 볼 수 있도록 책이 편집되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부터 현대의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까지 쉽게 스토리텔링으로 서술되었기 때문에 인문학에 대한 거부감 없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엮어져 있어서 그들의 사상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아울러 <잠깐> 이라는 코너를 통해 인문학 지식을 다양한 사례와 함께 현실에 접목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인문학을 처음으로 접하는 초보자인 초중고생들과 일반인들에 필요한 인문학 입문서로 손색이 없다. 2017/2/8 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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