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미술 읽기(수태고지) : 프라 안젤리코 (Fra Angelico)의 수태고지(受胎告知) - 붓을 쥔 성 프란체스코 -
프라 안젤리코 (Fra Angelico)의 수태고지(受胎告知) - 붓을 쥔 성 프란체스코 -
Ⅰ. 들어가는 말
초기 르네상스 시대 때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활동했던 안젤리코는 도미니코 수도회 수사 신부였다. 그의 그림은 신심 깊은 삶에서 우러나온 영성적인 체험이 녹아든 작품이며, 이 작품을 보는 이로 하여금 거룩한 것을 관상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안젤리코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안젤리코의 생애, 안젤리코의 작품세계와 영성, 작품해설 : 안젤리코 이전의 수태고지(1333년의 마르티니의 수태고지), 안젤리코의 수태고지(1430-1432의 안젤리코 수태고지, 1433-1434의 안젤리코 수태고지, 1338년 무렵 안젤리코의 수태고지, 1438-50의 안젤리코 수태고지), 안젤리코이후의 수태고지(1445년 무렵 필리포 리피의 수태고지, 1473-1475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수태고지,1489년 보티첼리의 수태고지의 수태고지)를 통하여 안젤리코의 수태고지의 진면목을 고찰하는데 의미가 있다.
Ⅱ. 시대적 배경
15세기 이탈리아의 궁정들은 격렬한 정치적 현실의 토대 위에 세워진 인공적인 세계였다. 1430년대의 피렌체 공화국은 명목상으로는 아직 공화국이었지만 실제로는 이미 부유한 상인들의 엘리트 집단이 지배하는 군주국이 되어 있었다. 이 과두정의 지배자들은 미술과 건축의 새로운 이용법을 많이 찾아냈다.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에서는 피렌체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이런 일이 되풀이되었다. 그 궁극적인 결과는 미술 자체의 재평가였다. 15세기 피렌체에서 가장 유력한 금융 가문이 메디치가가 주문한 예술작품에서 그 과정의 초기 단계를 더듬어 볼 수 있다.
1436년에 메디치가의 어른인 코시모 데 메디치는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 안에 있는 도미니크회 수도원을 재건하고 설비를 갖추는 데 돈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은 부자들이 오래 동안 그 기부금을 내고 예배당을 지어 기독교의 기반을 강화하는 동시에 연옥에 떨어질 가능성을 줄이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한 개인이 42개의 독방과 피렌체에서 가장 넓은 도서관을 갖춘 수도원을 통째로 기증한 것은 전례없는 일이었다. 42개의 독방은 종교적 묵상을 돕기 위한 그림으로 장식되었다. 도미니크회 수도사인 프라 안젤리코와 그의 공방 조수들이 제작한 이 프레스코회는 표현양식의 제약과 극단적인 명쾌함을 결합시켰다. 도미니크회 수도사들은 한 개인이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 만들어 준 새로운 거처에서 마음이 불편했을지도 모른다. 수도원 위층의 눈에 잘 띄는 위치에 그려진 프라 안젤리코의 프레스코화 ‘어둠의 마리아’에는 성 도미니쿠스가 등장한다. 그는 그림 속에서 관객을 강렬한 눈빛으로 응시하면서, 손에 받쳐 든 책의 펼쳐진 페이지를 가리키고 있다.
Ⅲ. 프라 안젤리코 생애
1400년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동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비키오(vicchio)에서 태어난 안젤리코는 1417년에 형 베네데토와 함께 피렌체의 한 필사본 작업장에서 일했는데, 이때 형은 필사가로, 안젤리코는 채색화가로 교육을 받았다. 20세에 피에솔레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신앙심 깊고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으면서 기도 생활 틈틈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때 안젤리코는 조반니 다 피에솔레(Giovanni da Fiesole)라는 이름으로 작품 활동을 하였으며, 1436년부터는 그의 절정기에 속하는 작품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에서 생활하였다.
1445년에는 교황의 부름을 받고 베드로 대성전의 경당과 바티칸 궁내에 있는 경당 및 교황의 개인 경당에 프레스코화를 제작하였다. 재능 있는 화가로서 명성을 얻었으나, 안젤리코는 이름에 걸맞게 매우 청렴한 생활을 했던 그는 당시 교황이 그를 피렌체의 대주교로 임명하려 하자. 다른 신부를 적극적으로 추천하기도 하였다. 1450년경 피렌체로 돌아가 약 2년동안 피에솔레 수도원장을 역임하였고, 1453년경 다시 로마로 왔다가 이곳의 도미니코 수도원에서 1455년 2월 18일에 숨을 거두어 산타 마리아 델라 미네르바 성당에 안치되었다. 1960년에 시복되었으며, 1984년에 예술가와 미술가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Ⅳ. 프라 안젤리코 작품세계와 영성
1. 작품 세계
안젤리코가 화가로서 활동하던 시기는 피렌체에 르네상스의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하던 때였기 때문에, 그의 초기 작품에는 장식적이고 우아한 고딕양식의 영향과 보다 사실적인 묘사에 충실했던 르네상스 양식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성서와 성인의 이야기를 다룬 교회적인 내용이 주된 주제였으며, 여러 성당과 수도원을 위하여 제단화를 비롯한 많은 종교적인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형식적인 면에서 일련의 변화를 보였는데, 초기에는 등장인물의 의상 등에 나타난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 황금색의 사용 등 고딕적인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나 인체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명암법, 단축법, 원근법에 매우 충실했고, 당시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등 르네상스 시기의 새로운 흐름에 관심을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젤리코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1438-1445년, 산 마르코 수도원에서 작업한 그림들에는 급격한 변화를 보인다. 색채는 극히 제한되고 구성은 단순해지고 배경묘사도 사라진 압축적이고도 간결한 표현이 주를 이루는 데 이는 수도자들의 명상과 기도를 돕기 위하여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또 이곳에서 안젤리코는 건축과 회화를 조화시킨 작품을 제작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이 수도원 북쪽 복도에 그려진 [수태고지] 입니다. 그는 이 작품을 상대적으로 어두운 곳에 위치시킴으로써 빛에 의한 효과를 극대화하였으며, 프레임을 그려 넣어 2차원의 벽에 3차원적인 환영을 부여하여 그림이 조각처럼 보이도록 하였다. 화면 전면에 가로로 세워진 기둥들은 15세기 이탈리아 회화에서 성모 마리아의 집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고린토 양식의 주두인 반면에, 대각선으로 세워진 기둥은 산 마르코 수도원 건축에 실제로 사용된 이오니아식 주두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수태고지가 이루어진 곳이 성서에 기록된 대로 나자렛에 있는 마리아의 집인 동시에 수도원이라는 것을 이중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이를 통하여 수도자들에게 순명의 자세를 지닐 것을 강조하는 교훈적인 효과를 이끌어 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의 로마 시기 작품은 산 마르코 수도원 시기의 단순함과 소박함에서 벗어나 건축적이고 웅장해졌으며, 구성면에서도 한층 탄탄해진 모습을 선보였다. 종교적이 주제전달은 물론, 형식과 공간 탐구에 탁월하였던 안젤리코는 파브리아노와 도메니코 디 미켈리노를 제자로 두었으며,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등 그의 뒤를 따르는 피렌체의 많은 화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2. 안젤리코의 그림과 영성
조토는 성 프란체스코의 영혼에 매우 가까이 다가가긴 했지만 속세의 사람인데다 피렌체의 부유하고 지위 높은 시민이었으며, 세 아들과 세 딸의 아버지였다. 프라 안젤리코는 모든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접근했다. 그는 모든 육체의 유혹에서 멀리 떨어져 살았다. 그는 병자를 문병하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나날을 보냈다. 조토가 인물의 바깥 면을 그렸다면 이에 반해 안젤리코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물의 바깥뿐 아니라 인물의 내면도 그렸다. 그는 자신을 또 하나의 성 프란체스코, 다시 말하여 붓과 캠퍼스와 물감 통을 든 프란체스코로 단련하여 그것을 해냈다. 교회가 그에게 ‘프라’라는 성스러운 명예를 얻을 자격이 있다고 선언하고 화가로서는 유일하게 성자들의 대기실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했을 때도 그 점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특히, 15세기 중반에 조토의 진정한 계승자들은 프라 안젤리코와 마사초이다. 르네상스 정신은 프라 안젤리코의 표현이 풍부한 형태의 탐구 속에서 감지된다. 하지만 그 영감은 여전히 중세적이다. 그는 수도원 제도의 위대한 창시자들인 성 도미니코에게서는 영성(靈性)을, 성 프란체스코에게서는 그 신비주의 시학의 영향을 따르고 있다. 그는 산 마르코 수도원의 각 방마다 주 예수의 일생을 상기시키는 일련의 프레스코들을 그린다. 교회가 시복을 내린 이 화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신앙심으로 천국의 문을 열지 않을 수 없었고, 우리에게 그것을 의심하지 말도록 설득하였다. 즉, 하느님은 그의 이미지대로 인간을 만들었다고 하므로, 신의 이미지가 바로 우리 인간들 속에 있는 것이다.
Ⅵ. 작품 해설
1. 안젤리코 이전의 수태고지
1) 1333년의 마르티니의 수태고지
시에나에서 활동한 마르티니(Simone Martini, 1284-1344경)는 중세적 요소와 새로운 인물표현 방법을 조화시켜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우아한 그림들을 남기고 있다. (그림 1)는 라르티니와 멤미가 제작한 수태고지다 대천사인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마리아님 많은 은총을 받으소서”라고 말하는 것이 그림에 금색 글자로 쓰여 있어 이채롭다. 가브리엘이 왼손에 들고 있는 나뭇가지는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 가지다. 그림의 가운데에 놓인 흰 백합은 순결을 상징하며, 그 위 첨두형 아치밑에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날고 있는 비둘기는 성부을 나타낸다.
수태고지에서 대천사 가브리엘은 이제 막 마리아의 앞에 내려앉은 듯, 옷자락이 펄럭이고 날개가 아직 접히지도 않았다. 두 날개는 아치 안에 채워지게 그려졌으며, 그 옆 아치에 있는 작은 천사들이나 마리아의 머리도 각각 아치 안에 그려놓았다. 중세적 패턴과 새로운 표현방법을 절충하여 효과적으로 조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의 얼굴도 그다지 현실감 있게 보이지는 않으나, 전체적으로 사물은 현실적 무게감을 지니고 확실하게 바닥에 놓여 있다. 르네상스 회화의 이상인 사실적 생명력의 표현에 있어서 마르티니의 그림은 조토의 그림에 비해 뒤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아함에 있어서는 상당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조토는 르네상스 회화의 확실한 선구자로서 과감한 변혁을 가져왔으나, 마르티니는 전통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온건한 변화를 모색했다.
2. 안젤리코의 수태고지
1) 1430-1432의 안젤리코 수태고지( 그림)
외편 위쪽을 보면 하느님의 손으로부터 하느님의 손으로부터 빛을 타고 성령의 비둘기가 내려와 마리아에게 다가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대천사 가브리엘이 하느님의 심부름꾼임을 명확히 하고 있는 장면이다. 벽 건너편에 또 다른 방이 보이는데, 그 안에는 관찰력을 과시하듯 의자도 그려 넣었다. 왼 편에 보이는 정원은 온갖 꽃들과 나무들이 당시 귀족들의 잘 꾸며진 정원을 연상시킨다. 천사와 마리아 사이에 놓인 기둥위의 원 안에 있는 사람이 예언자 이사야이다.
왼편에는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쫓겨나는 모습이 있는데 수태고지에 아담과 하와를 등장시킨 이유는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죄를 지었고 낙원에서 쫓겨났는데 성토마스는 아담이 잃었던 광명을 되찾기 위해 예수가 왔다고 했다. 수태고지가 있는 3월 25일은 바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쫓겨난 날과 일치한다고 한다. 당시 화가들이 성모영보 속에 아담과 하와를 그린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안젤리코가 그린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를 마사초의 그림과 비교해보면 서로간에 유사점이 발견된다. 그러나 안젤리코의 아담과 하와는 추방당하는 순간의 슬픔이 그다지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았다. 완전 누드 대신에 털옷을 멋지게 지어 입힌 것은 수도사다운 멋진 발상이다. 뒤에 그려진 천사도 두 남녀를 냉혹하게 내쫓는 모습이 아니라 다정한 안내자처럼 보인다. 모든 것이 완화되고 절제되었다.
2) 1433-1434의 안젤리코 수태고지 (그림)
화면 한 가운데 분홍색의 옷을 입고 금색의 화려한 날개를 가진 천사가 “쉿”소리를 내는 듯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며 무어라 속삭인다. 사랑의 상징인 붉은 색 옷과 지혜의 상징인 푸른색 망토를 두른 채 천사와 마주 보는 한 여인의 무릎에는 성서가 놓여 있다. 이 여인이 바로 마리아이며, 마리아의 머리 위로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금빛에 쌓여 빛나고 성부는 건축물에 있는 원형 안에 작지만 정교하게 조각처럼 새겨져 있다. 황금색이나 장식적인 문양을 많이 사용한 점은 이 작품이 양식적으로는 아직 국제고딕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보여주나, 화면에 깊이감을 주는 입체적인 건물을 사용한 것은 르네상스 화가다운 면모이다. 즉, 이 작품은 국제고딕에서 르네상스로의 변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그림에서 아주 흥미로운 부분은 성모영보가 일어나고 있는 실내의 바깥쪽 멀리, 천사에 의해 낙원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이브가 그려진 점이다. 즉 죄에 대한 심판-좌측과 구원에 대한 희망-우측이 대비되어 표현되었다. 타작마당에서 손에 키를 드신 하느님은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태우시듯이 죄를 범한 인류의 조상을 내치셨지만, 죄 많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친히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다. 구원의 선물로 말이다. 지금은 그 구원의 선물을 기다리고 또 기다릴 때이다.
3) 1438년 무렵 안젤리코의 수태고지 (그림)
4) 1438-50의 안젤리코 수태고지 (그림 )
산 마르코 수도원 이충에는 수도사들이 기거하던, 첼라(cella)라는 불리는 작은 방들이 수십 개 이어져 있다. 그 방안에 안젤리코는 자신의 대표 작품이 될 프레스코 벽화를 그렸다. 현재 이 방의 일부는 알반인에게 공개되고 있다. 방안에 들어가 보면 당시 수도사들의 엄격한 생활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그곳은 성인 혼자 겨우 기거할 정도의 작은 공간으로 감옥의 독방을 연상시킨다. 외부세계를 볼 수 있는 곳이라고는 손바닥만한 창문뿐이며, 철저하게 폐쇄되어 있다. 그 적막한 공간마다. 안젤리코는 예수의 생애를 한 장면씩 그려 넣었다. 명상과 기도에 몰입하던 수도사들에게 정신적, 종교적 힘을 불어넣기 위함이었다. 그 중의 한 방에 또 다른 수태고지가 그려져 있다. 이번에는 천사와 동정녀가 아무런 장식이 없는 회랑 안에 있는 모습이다. 화가는 절제된 공간 연출을 위해 앞의 그림에서 보여주었던 중앙의 기둥마저 없앴다.
옆의 기둥들도 천사의 날개로 가림으로써 불필요한 시선을 모두 제거했다. 복도에서 보았던 수태고지와는 천사의 모습에서도 차이가 있다. 천사는 명령하듯 서 있고, 말씀을 듣는 마리아는 무릎을 꿇은 채 복종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수도자들의 자세를 암시하고자 함이었을까? 수도사들의 분심(分心)을 없애고, 종교인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게 하는데 이같은 그림은 많은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그림 왼쪽에는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한 수도사의 모습이 보인다.
이 사람은 13세기 초에 살았던 성 베드로 순교자로서 성 도미니쿠스로부터 직접 사제 서품을 받고, 평생을 수도원에서 고행하며 지냈다고 한다. 고적한 수도원에서 지내는 수도사들에게 모범이 되었을 성인을 이 신비의 순간에 동참시킨 것이다. 이 그림에서 화가는 기교의 무의미함을 알고, 오로지 깊은 신앙심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안젤리코의 그림이 늘 이렇게 엄격한 신앙심을 강조했던 것은 아니다.
3. 안젤리코 이후 수태고지
1) 1445년 무렵 필리포 리피의 수태고지
건축 구성과 인물 구성이 제대로 어울린다. 무릎 꿇은 천사가 마리아를 올려다본다. 간이 책상에 기도서를 올려놓고 읽던 마리아가 놀랐다. 천사를 돌아다보는 마리아의 옷주름이 크게 요동한다. 손바닥을 보이며 치켜 올린 왼손은 거부의 의사 또는 감정적 동요를 의미한다. 다섯 가지 반응 가운데 가장 인간적인 '놀라움'의 계기가 재현되었다. 그러나 마리아의 표정은 몸짓과 달리 침착하다. 낯선 이에 대한 두려움을 누르고 그의 말뜻을 새기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이와 같이 처녀의 묘한 감정적 변화를 손짓과 자세 그리고 표정의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것은 화가의 비길 데 없는 역량이다.
천사는 왼손을 가슴에 얹어서 자신의 의중을 밝히고, 오른손에 백합 송이를 들었다. 순결과 정결과 무염시태를 상징하는 순백의 백합이 눈부시게 빛난다. 만약 꽃잎이 칼날처럼 생긴 아이리스가 백합을 대신했더라면 마리아의 놀라움은 고통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백합을 위한 화병은 미리 준비되었다. 투명한 물병에 맑은 물을 담았다. 북구의 이름난 정물화가들과 겨루어서 조금도 뒤지지 않았던 리피의 솜씨다. 수태고지의 물병은 북구에서 수입한 마리아의 새로운 상징이다. 물병 허리까지 물이 찼다. 밖에서부터 비쳐드는 빛이 물병 바깥 표면에 떨어지면서 물병 안팎과 물 속에 빛점을 떨군다. 물병 그림자가 마리아를 향해서 길게 누웠다.
그러나 이런 자연 관찰과 실물 재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원근법적 구성과 인체 비례는 여전히 완전하지 않다. 건축물들이 내뻗는 소실선들이 중앙 기둥 뒤에서 마구잡이로 충돌한다. 평면 그림을 안쪽으로 둥글게 패인 방패 모양으로 접어서 본다면 낫게 보일지 모르겠다. 게다가 나이 어린 천사의 체구도 마리아에 비해서 거대하게 부풀어 보인다. 리피는 안젤리코와는 달리 등장인물과 건축배경에 일관된 그림자를 새겨 넣었다. 신성의 빛이 지배하는 기적의공간이 아니라, 자연의 빛이 비쳐드는 현실 공간이 수태고지의 실감나는 현장으로 채택되었다. 리피는 후광을 제외하고 그림에서 금색을 완전히 걷어 냈다. 마리아와 천사들의 후광도 평면성을 극복하고 자유롭게 움직인다.
2) 1473-1475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수태고지
르네상스시대의 그려진 수태고지들은 한결같이 옥외의 회랑 아니면 건물을 배경으로 한 뜰을 무대로 하고 있다. 왜 옥외의 회랑이나 건물을 배경으로 한 장소를 택했을까? 이는 꼭 이 주제의 작품에만 국한하지 않고 대부분의 르네상스시대 그림들이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때로는 자연 경관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도 없지 않지만 도시의 건물, 특히 주랑이 늘어선 도시의 일각을 배경으로 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내용은 성서에서 따 왔지만 배경은 당대 현실을 적용했음을 알 수 있다. 굳이 이 주제가 아니라도 거의 대부분의 르네상스시대 작품들이 그러하다. 그러니까 15, 16세기 이태리인들의 풍모에다 이태리의 도시 풍물들이 고스란히 성서의 내용을 매개해 주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보아야 한다.
3) 1480-1485년 로렌초 디 크레디 의 수태고지
고대풍의 건축 실내에 마리아의 거처가 마련되었다. 배경 오른쪽에 진녹색 침대보를 늘어뜨린 처녀의 침소가 보인다. 코린토스식 기둥머리를 얹은 사각 벽주는 고대유적에서 베껴 온 장식들이 필리그란처럼 섬세하다. 각주와 아치 창이 교차하는 르네상스식 건축 형태는 알베르티가 설계한 루체라이 궁 주정면에서 빌려왔다.
크레디는 성령의 비둘기를 그리지 않았다. 빛살도, 성부의 형상도 생략했다. 천사는 백합을 지참하지 않고 마리아는 물병을 가져다 두는 일을 잊었다. 천사와 마리아가 서 있는 공간은 조화롭고 여유롭다. 고대의 교훈이 적절한 인체와 공간 사이의 비례를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가격도 긴박하지 않다. 천사의 전갈에 대해서 마리아는 여유롭게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 선택의 시간은 아무리 서둘러도 모자라게 마련이다. 마리아는 한 손을 들어서 신성의 은총의 의미를 암시하고, 다른 손으로 옷자락을 거두며 자신의 아랫배를 가리킨다.
그림 하단에는 붓으로 새긴 섬세한 부조가 화와의 이야기를 전한다. 왼쪽부터 하느님의 손짓을 따라서 아담의 옆구리에서 태어나는 하와, 선악과를 아담에게 권하는 하와, 낙원에서 추방되는 아담과 하와가 그려져 있다. 하와가 선악과를 취하여 후손에게 원죄의 올가미를 씌웠다면, 마리아는 구원주를 잉태하여 인류의 죄악을 거두고 대속할 것이다. 하와는 인류의 첫 번째 어머니요, 마리아는 인류의 두 번째 어머니다.
4) 1489년 보티첼리의 수태고지
흰 백합을 든 천사가 마리아의 처소를 찾았다. 피에트라 세레나를 깎아서 세운 뒷벽이 수태고지의 행복한 배경이다. 네모꼴의 규칙적인 바닥 격자가 공간적 원근을 암시한다. 북구 도시 풍경이 피렌체 시의 전경을 대신해서 너른 원경을 차지했다. 천사는 날개를 접지 못했다. 왼쪽 발을 내밀고 성급히 무릎을 꿇었지만 왼발의 자세는 다급한 움직임을 지탱하기에 어중간하다. 마리아는 상체를 크게 휘둘러서 몸을 뒤로 젖힌다. 하체와 상체, 상체와 머리에 각각 입체적인 S 형태가 그려진다. 적어도 인체의 움직임에서만은 후기 고딕의 조형문법을 벗어나지 못했다. 손바닥을 노출한 채 두 팔을 앞으로 뻗은 마리아의 자세는 거부 또는 부정의 의미로 읽힐 수 있지만, 보티첼리는 여기에 다른 뜻을 담았다. 화가는 앞서 그린 <프리마베라>의 한복판에 등장하는 베누스의 자세와 손짓에서도 같은 동작을 되풀이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취하는 손짓의 의미도 '반가운 영접'이다. 마리아는 천사의 출현에 놀라움을 표현하는 대신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는 순종의 의사를 밝히는 셈이다.
그림의 소실선들은 보는 이의 시점에 대응하는 화면 위의 한 점으로 일제히 수렴한다. 보티첼리는 선형 원근법을 설득력 있게 실행한다. 삼차원적 공간을 이차원의 그림 평면 위에 옮겨 내는 일은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가 회피할 수 없는 숙제와 같았다. 수학과 기하학의 권위를 빌려서 회화를 자유 예술의 지위에 올리려는 열망이 원근법적 회화라는 이름으로 나타났다. 보티첼리가 그린 <수태고지>를 두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천사가 마리아를 방 바깥으로 쫓아내려는 것처럼 보인다."고 혹평했다. 혀 없는 붓을 무기 삼아 휘두르는 화가는 말 못하는 벙어리의 손짓과 표정을 보고 배워야 한다고 했던 레오나르도는 천사와 마리아의 과장된 동작이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2004/ 6/ 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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