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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社會·敎育〕산책

여성주의 운동의 함정: 페미니스트와 워마드

by 뜨르 K 2018.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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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운동의 함정:  페미니스트와 워마드

요즘 오세라비(본명 이영희)의 책이 화제가 되고 있다. 그가 주목을 받게 되는 이유는 그의 저서 “그 페미니즘은 틀렸다”에서 ‘페미니즘이 한국 사회를 후퇴하고 있다’ 고 하는 저돌적인 선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 기존의 페미니스트의 주장과 다르다. 지금까지 기존의 페미니즘(feminism)이 여성주의, 여성중심주의 그리고 여성해방주의 측면을 강조했다면 그는 여남의 동등한 인간적 측면에서 접근한다.  여기에는 힘의 논리로 여성과 남성을  보고  있지 않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하는 휴머니즘 측면에서 이다. 만약  여성과 남성이 인간 평등성의 가치적 측면에 접근이 차단된 채  오직 성(姓) 대결만이 주요 이슈로 부각된다면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결국 여와 남이 서로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전쟁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는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필자는 없다고 본다. 

 

대표적인 예가 경찰의 몰카 편파 수사를 비판하는 집회였다. 이 집회는 지난 5월 처음으로 시작됐다. 첫 집회에는 주최 측 추산 1만2000명이 모였고 2차 집회에서는 2만2000명으로 3차에서는 6만 명의 여성이 모였다고 한다. 그리고 7만 명의 4차 모임도 있었다. 그리고 10월 6일(2018년) 5차 집회도 예정되어 있다. 문제는 페미니스트의 운동으로 여겼던 집회가 남성 협오 발언으로 무장되었기 때문에 이 집회가 워마드와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워마드는 리비아 무장단체에 의해 피랍돼 2018년 8월 3일 기준으로 29일째 억류 중인 한국인 남성을 조롱해 논란에 휩싸인 상태다. 회원들은 이 남성에 대해 “60대면 어차피 낼 모레 죽을 XX 아니냐”, “이거 이 XX 구해주기만 해봐라”, “표정이 별로 안 간절해 보인다. 구하지 마라”, “한남이 고통받으니 기분 좋다” 등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또 다른 회원은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서 “우리 국민은 제주도에서 죽어 나가고 있다. 도와주기만 해봐라. 청와대 불 지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뿐만 아니라 안중근·윤봉길과 같은 독립운동가, 고(故) 노무현 대통령 등을 비하하는 게시글도 게재했다. 심지어 위인들을 조롱하기도 했다. 세종대왕, 이황, 이순신, 김구, 윤봉길, 안중근 등 남성 위인들을 ‘12한남’이라며 조롱한 것이다. 그 외에도 화제가 된 남성들을 무차별적으로 조롱하다가 이번에 성체훼손에 성당 방화 예고까지 등장했다. 도 넘은 여성주의 운동이다. 한국 남성이면 무조건적으로 비판하는 남성 혐오 시위가 아니냐는 논란에 휩싸였다. 이들에게는 무조건 남성이면 공격의 대상이 된 것이다. 여기에서 페미니스트가 여성주의 운동인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아무튼 워마드가 주장하는 구호를 보면 여성우월주의나 여성중심주의 운동에 가까운 일종의 여성주의운동이다. 그래서 페미니스트가 추구하는 내용은 더 더욱 아니다. 워마드의 가입 조건을 보면 생물학적 여성만이 가입할 수 있다고 되어 있고 집회 참가 자격도 마찬가지이이다. 언론에선 주로 여성 인권을 위한 모습으로 보도된다고 할지라도 그들 스스로 도 여성 운동 단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행동이나 글이다. 대학로 집회 등에서 남성혐오 발언이나 성체훼손이나 성당 방화 예고 글 등을 볼 때 그렇다. 상식과 도를 넘어서는 남성혐오 발언 등 극단적이고 공격적인 여성주의 운동의 목소리만 있을 뿐이다. 원래 페미니스트는 여성/남성이라고 하는 중립적인 용어가 아니라 의식적이고 정치적인 진술이다. 사람마다 다양한 해석이 있기는 하지만 결코 생물학적인 이분법을 말하는 용어는 결코 아니다. 어찌 보면 페미니스트는 전통적인 가부장제적인 성차별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이것은 가치관, 제도, 의식, 구조와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남성에 의한 여성의 억압의 차원뿐만 아니라 강자-약자, 부자-가난한 자, 제1세계-제3세계, 이성애자-동성애자 등 지배와 종속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체계에 일종의 저항 운동이다. 이런 의미에서 페미니즘은 정치적인 용어이다. 다양한 토대들에 의하여 ‘중심부’에서 배재되어 온 ‘주변부’ 들의 평등과 인권, 그리고 정의에 초점이 있다. 이것은 일방적 여성주의자 운동과는 다르다. 그래서 만약 ‘페미니스트’를 여성주의자, 여성해방주의자로 번역하면 ‘여성우월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 거꾸로 여성은 남성 보다 더 평화롭고 사랑을 소유하는 존재 등 여성성을 강조하다보면 가부장체제에서 이용당할 수 있는 소지가 있어 역시 주의해야 한다.

 

앞에서 소개한 오세라비(본명 이영희) 작가는 여성들에게 "이퀄리스트가 돼라"고 말하면서 "휴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근 페미니즘 흐름을 '남녀 분리의 이분법적 행태'로 규정하면서 여성과 남성이 같은 위치에서 연대하고 협력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상대를 향한 혐오가 아니라 인간성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의견에 대해 필자도 동의 한다. 필자가 여성운동 및 여성신학에 관심 가졌던 시기가 거의 20년 전이다. 국내에서 여성운동이 활발하지 않을 때이다. 한국여성신학을 꾸준히 구독하고 가끔 여성교회 예배에도 참석했다. 그 때 당시 늘 마음 속에 품은 의문점 하나가 있다. 그게 바로 여성운동이 방향이었다. 여성과 남성이라고 하는 이분법적인  접근 말이다. 이런 접근은  결국 남녀 대결로 귀결되고  진정한 페미니즘거 거리가 멀다는 마음 속으로 결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 1970년도의 여성운동의 방향은 힘의 논리 접근방법이었다. 이런 여성운동은 급진적인 운동으로 일종의 여성주의 운동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하다거나 반대로 남성이 여성보다 뛰어나다는 관점으로 이분법적인 대결만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지양해야 할 여성운동이다. 게일 루빈 <여성 거래: 성의 ‘정치경제’에 관한 노트>에서 게일 루빈은 ‘섹스/젠더 체계’라는 개념을 말하면서 이분법적인 성별 구분이 여성과 남성 사이의 위계를 만들고 이성에 대한 욕망을 강제하고 특정한 사회 경제적 통제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제도적 매개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인도 힌두교에서는 여성도 남성도 아닌 제3의 성인 히즈라 hijra라는 성별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힌두교 신화에 등장하는 많은 신들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모호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제3의 성인 모호성은 틀림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한 공존을 위한 것이다. 오세라비(본명 이영희) 작가도 남녀 공존을 이분적인 접근이 아닌 휴머니즘적인 접근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필자도 휴머니즘적인 접근이 옳다고 본다. 그 이유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페미니즘이 단순히 여성주의 운동이 아니라 인간성 회복운동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세라비(본명 이영희)도 그의 저서에서 한국의 여성 인권도 어느 정도 향상되었으며 현재는 성차별 크지 않다고 말하면서 남녀를 분리하려고만 하는 페미니즘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 말은 여성운동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다만 여성운동 방식에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 이분법적이고 반목으로 인한 극단적인 방식으로는 결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다만 남녀 연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예를 들면 그의 주장에 의하면 “페미니즘과 결합한 '미투'(Me to)도 남성을 공격하는 도구로 변질되거나 “비동의 간음죄 도입 역시 악용될 소지가 있어 재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만이 아니라 "여성과 남성 협력해 새로운 정책과 제도 만들자"라고 제안하며 "강단 페미니즘, 직업 페미니즘등도 모두 사라져야"한다는 독특한 논리를 앞세우면서 페미니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미투'의 창시자인 타라나 버크도 '미투'는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운동이지 페미니즘 운동과 다르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미투'는 사회적 소수 계층 여성들이 권력자들에 의한 성적 착취에 반기를 드는 운동이다. 결국 미투가 페미니즘과 결합해 변질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나라에서 미투(Me to)운동도 남성을 공격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더욱이 ‘메갈’이니 ‘워마드’니 ‘한남충’이니 ‘남혐’이니 ‘여혐’이니 등도 남녀 갈등이 심상치 않다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페미니즘은 남녀 간의 차이는 인정하되 차별은 타파하자는 데 초점이 모아져야 한다. 극혐의 남녀 대립 구도로 서로를 적(敵)으로 여기면 성차별은 영원히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상호 보완하는 존재다. 즉 여성과 남성은 동반자이지 적이 아니다. 물론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측면에서 볼 때 문화와 사회의 제도 및 사상에서 여성을 비하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여성 차별의 적(適)이 남성 중심주의(男性中心主義)이지 남성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차이가 차별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은 여성주의가 아닌 페미니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고려할 때이다. .  2018/9/28 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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